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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12. 2021

호랑이 형님이 사라진 세상

문득 슬퍼지는 혐오 사회

<호랑이 형님과 나무꾼 아우>라는 동화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많고많은 동화 중에서도, 이 이야기는 어린시절의 나에게 특별히 더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나무꾼이 살고 있었는데, 나무를 하러 갔다가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는 당연히 나무꾼을 잡아먹으려고 했다. 궁지에 몰린 나무꾼은 순간적으로 꾀를 내었는데, 호랑이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통곡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랑이는 당황해서 내가 왜 네 형님이느냐고 물었다. 나무꾼이 말하기를, 어릴 적 어머니가 호랑이를 낳아 산 속에 몰래 버렸는데 그게 바로 당신이라는 것이다. 호랑이는 그 말을 믿고 나무꾼을 놓아주었고, 심지어는 짐승을 잡아 아우의 집 앞에 가져다 두는 등 극진한 효도까지 하게 된다. 훗날 어머니가 죽자 호랑이는 한참동안 통곡하며 슬퍼하였고, 급기야 자신도 죽음을 맞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무꾼은 호랑이를 형님으로 여기며, 어머니의 묘 옆에 호랑이 형님을 묻어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냉정한 시각으로 보면, '감정에 휩쓸려 근거 없는 말을 믿게 되면, 큰 화를 입는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호랑이는 나무꾼의 눈물에 속은 죄로, 평생동안 타인에게 이용당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가족이 아닌 자를 가족이라 믿으며 시간과 재물, 감정까지 착취당한 셈이다. 현실 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은 자주 벌어진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의 안타까운 사연에 속아 술자리에서 섣불리 보증을 섰다가 패가망신하는 일, 선의로 기부했던 돈과 물건들이 당사자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중간에서 엉뚱한 사람의 배를 불리는 일, 상품을 넘겨주고 대금을 어음으로 받았다가 돌려받지 못하는 일 등 그럴싸한 말에 속아 상처받게 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에서 진심으로 감동받았던 이유는, 그런 현실적인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다. '나와 너'로 양분되었던 존재. 심지어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잡아 먹으려고 했을 정도로 적대적이었던 관계가 '우리'라는 관계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때로 사람은 '우리'가 되는 일에 놀라울 정도로 관대하다. 왜 그런 장면들 종종 보지 않나. 사복을 입은 남자 둘이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어나려는 일촉즉발의 상황. "내가 해병대 출신이야 임마. 넌 죽었어" 하는 말에 상대방이 "어? 해병대? 몇기야?"하고 대답하고. "나 867기인데?" "필승 931기 오태식입니다!" 같은 대화들이 이어지며 훈훈하게 술 한 잔을 같이 하게 되는 순간들. 대학가 술집에서 진짜 후배인지도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진짜 선배인지도 모르는 어른이 술값을 계산해준다든가 하는 순간들. 유원지의 직원이 동향사람이라는 말에 규칙까지 어겨가며 손님의 편의를 봐주는 일 등. 사람들은 때때로 신분증 확인이나 복잡한 검증절차는 깡그리 무시한 채로 '우리'라는 무리로 엮이곤 한다.


일단 우리가 '우리'로 엮이고 나면 그 다음에는 생각보다 질기고 뜨거운 관계가 된다. 호랑이가 종족의 차이를 무시하고 효도를 하는 일이나, 나무꾼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호랑이를 형님으로 모시는 일은 '우리'로 이어진 관계가 얼마나 돈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누구든 일단 '우리'라는 이름으로 한 번 묶이게 되면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라는 관계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얄팍한 거짓말이나 한 쪽만의 노력으로는 부족하다. 호랑이가 짐승을 잡아 선물했을 때, 어머니는 이를 기특히 여기며 호랑이가 먹을 수 있도록 집 앞에 밥을 지어 대접했고, 호랑이가 어머니를 따라 죽었을 때, 나무꾼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형의 묘를 써주었다. 서로간의 진심이 공평하게 교환될 때 비로소 '우리'라는 시너지가 발생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여러 어려운 시국과, 경제난으로 인해 사회 전체적으로 '우리'라는 관계가 약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성별 간, 계층 간, 이념 간, 세대 간의 갈등이 이토록 극심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선의를 주고받는 선순환이 사라지다보니 결국 남는 것은 싸움이다. 온갖 분노와 혐오로 가득찬 세상. 나도 덩달아 그 분위기에 잠식되고 날카로워지는 기분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조차도 좋아했던 동화를 더듬더듬 떠올리며 조금 슬퍼하는 글을 쓸 뿐. 어쩔 도리가 없다. 진단은 되는데 누구에게도 해답은 없다. 호랑이와 나무꾼은 세대와 계층, 심지어는 종족의 벽도 넘어 형제가 되었는데, 우리는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같은 땅에 살면서도 '우리'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호랑이 형님과 나무꾼 아우>를 읽힐 자격이 되는가.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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