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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17. 2021

추억은 여전히 그곳에

이태원


1. 슬리퍼 - 고1


고1 때, 친구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살 게 있으니 같이 가자고. 주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마침 할 것도 없어서 친구를 따라나섰다. 버스를 타고 꽤나 걸려 이동한 곳은 2층짜리 나이키 이태원점. (아직도 있다.) 당시에는 키도 작았고, 지갑도 얇았고, 견문도 좁았어서 그 매장이 되게 크게 느껴졌다. 고등학생 특유의 영혼 없는 표정으로, 둘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친구 놈이 무얼 사나 했는데 놀랍게도 슬리퍼였다. 가격은 무려 오만 원. 나는 얘가 미친 줄 알았다. 우리 집보다야 형편이 좋았지만 아주 잘 사는 녀석은 아니었는데, 슬리퍼를 오만 원이나 주고 사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사치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오만 원짜리 슬리퍼를 사."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은데 친구는 들은 체 만 체 무심하게 결제했다. 3천 원짜리 삼선 슬리퍼 신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질문을 속으로 계속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거의 5년이 지난 뒤,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그 친구는 오만 원짜리 나이키 슬리퍼를 아직도 신고 있었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현명한 소비를 한 거였군. 나중에 친구한테 이 얘길 했더니, 그 이후로 3년은 더 신었다고 했다. "너한테 중요한 걸 배웠어."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이제는 자주 쓰거나, 오래 써야 하는 제품에는 돈을 별로 안 아낀다.  


2. 과잠 - 고3


제일 친한 친구가 이태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살 게 있으니 같이 가자고. 주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마침 할 것도 없어서 친구를 따라나섰다. 무얼 타고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도착한 곳은 이태원의 한 옷가게였다.(지금도 있는 지는 확인 못 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집이었는데, 나무로 된 인테리어에, 벽에는 각종 유니폼들이 걸려있었다. 아저씨는 3만 년 전부터 이곳에서 장사를 한 사람처럼 여유 가 넘쳤다. 친구가 몇만 원을 주고 구매한 건 연세대 과잠이었다. 그때 나는 연대 과잠은 연대 학생증이라도 보여줘야 내어 주는 것인 줄 알았는데, 돈만 내면 그냥 주는 거였다. 친구한테 이걸 왜 사냐고 물었더니, 신촌에 이거 입고 다니면서 연대생인 척도 하고. 미리 사놓고 공부에 박차를 가하려는 의도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차피 연대 갈 거라서 미리 사도 상관없다는 얘기도 했다. 그해 겨울 친구는 수능에서 전과목 1등급을 받고 이듬해 연세대에 입학했다. 여태껏 살면서 허세를 실력으로 증명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는데, 친구는 그걸 해냈. 재미도 있는 데다가, 해피엔딩이어서 나는 이 에피소드를 각별히 좋아한다.


3. 브런치 - 21살


조금 힙한 대학친구가 있었다. 옷도 잘 입고, 취향이 고급인 데다 괴짜 끼가 있어서 같이 있으면 꽤나 즐거웠다. 지금은 연락이 끊겨 소식도 모르고 지내지만 당시 우리는 한동안 단짝처럼, 거의 애인처럼 붙어 다녔다. 새로운 식당을 찾아다니며 밥도 사 먹고, 소주 아닌 다양한 술도 사 먹고,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커피도 사 마시고 무슨 그 당시 여자애들처럼 놀았다. 부유하고 힙한 부모님 밑에 외아들로 자라서인지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철이 없으면서도 생각이 깨어있고 위트가 있었던 점이 매력이었다. 어느 날은 그 친구가 브런치를 먹자고 연락을 했는데, 어디냐고 했더니 이태원의 패션5라는 곳이라고 했다.(지금도 있더라) 늦잠 자서 어중간하게 라면 끓여먹었던 것 말고는 브런치를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되게 그럴듯한 브런치 카페라고 해서 나는 남몰래 조금 긴장해버리고 말았다. 왜인지 이태원을 함부로 갈 수는 없어서 내가 가진 꽤 예쁘고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브런치를 먹으러 갔었다. 엄-청나게 고급스럽고 깔끔한 인테리어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골라주는 자리에 앉아서 메뉴판을 보다가 오믈렛 어쩌고를 시켰는데, 왠지 우유를 먹는 게 멋있을 것 같아서 따뜻한 우유를 골랐던 게 지금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다. 식사는 정말 한 손 바닥만 하게 적은 양이 나와서 후루룹 먹으면 오분 안에 끝날 양이었지만 친구랑 고상하게 대화를 나누며 삼십 분 동안 천천히 먹었다. 그날 이후로 무슨 브런치 카페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항상 이태원의 패션5를 들먹이면서 종종 브런치 카페를 찾아다니는 척을 꽤나 했었다.




오늘은 이태원역에서 한강진역까지 걸었다. 이태원역을 중심으로 길게 뻗은 길을 참 오랜만에 온 것 같은데, 걷다 보니 곳곳에 내 추억들이 여전히 남아서, 무슨 타임캡슐마냥 굴러다녔다. 변한 것은 변한 것대로, 변하지 않은 것은 변하지 않은 것대로 신기하고 반가웠다. 추억은 그 자리에 지박령처럼 계속 남아있다. 내 눈에만 보이는 지박령이다. 꼭 그 자리에 다소곳이 있다가 내가 가면, 나를 반기는 것 같다. 하루 종일 곳곳에서 떠오른 추억들을 적어도 10번까지 짤막한 글로 채우려고 했는데, 적다 보니 추억을 풀어놓고 싶은 기분도 어느 정도 해소가 되고, 밤도 늦었고 피곤하기도 해서 그만 적는 게 낫겠다 싶다. 적다 보니 서울 여기저기 지역마다 남은 추억들을 다 적어볼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신촌, 홍대, 강남, 잠실, 잠실 새내, 고속터미널, 건대, 혜화, 성수, 을지로, 동대문, 성신여대, 노원, 은평, 독립문, 종로, 상수, 합정... 서울 어디든 내 발자국이 조금씩은 있으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찔한 마음과 함께 그걸 다 적지 못할 이유도 떠오른다. 그 추억들을 모조리 글로 남겼다간, 익명의 독자들에게 나라는 사람을 통째로 들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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