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끝나면..."
빈말을 하지 않는게 자부심일 때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빈말을 남발하는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좀 징그러웠다. 빈말에 능숙한 사람들은 지나치게 매끄러웠고 속내를 알 수 없는 탓에 저절로 거리를 두게 되었다.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한때는 그 노력이 조금 엇나가서,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지나치게 솔직해버린 탓에 조금 무례하기까지 했다. 좋은 사람에게 좋다고 하고, 멋진 사람에게 멋지다고 하고, 예쁜 사람에게 예쁘다고 하는 만큼 싫은 사람에게도 싫다고 했다. 알바를 하다가 어떤 여자애가 “오빠는 저 왜 싫어해요?”라고 묻길래 “넌 싸가지가 없어.”하고 말해서 울린 적도 있었다. ‘내가 진심만 얘기하겠다는데 왜? 강자한테건 약자한테건 공평하게 솔직하면 쿨하고 멋있는 거 아니야?’ 오히려 당당했다.
평균이상으로 솔직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은 변함없지만, 요즘엔 빈말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에 심장이 덜컥 내려 앉을 때가 많아졌다. 빈말을 하려고 빈말을 한 것은 아니고, 진심을 얘기한 것인데도 행동이 뒤따르지 않아서 빈말이 되는 경우다.
“사랑합니다 교수님.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해놓고서는 3년째 안 찾아갔다. 막상 찾아뵈려니 용기가 안 나고, 이런 저런 걱정이 동반된 것이다. 혹시 교수님 바쁘신데 폐가 되지는 않을까? 반가워는 하실까? 금의환향도 아닌데, 조금 더 잘 돼서 찾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만 하다가 말았다. 결국 말 뿐이었다.
“진짜 밥 한 번 먹자”고 말한 친구와도, “보고싶다. 한번 모이자”고 말한 후배들과도 말뿐이었다. 100퍼센트의 진심으로 말했더라도, 결국 행동할 용기를 내지 못하면 빈말이 되는 것이었다. 애초 내가 징그러워했던 사람의 빈말이 내가 공수표처럼 남발하는 말뿐인 진심과 하나도 다르지가 않았다.
요새는 ‘코로나가 끝나면…’ 으로 시작하는 빈말을 추경예산처럼 뿌리고 있다. '나는 당장에라도 만날 수 있는데,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할까?' 상대방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어서 자꾸 방어적으로 말하게 된다. 만만한 코로나 뒤에 숨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용기가 나지 않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할 때 결과적으로는 내가 바로 그토록 징그러워 했던 빈말하는 사람이다.
모든 진심에는 그만큼의 용기가 꼭 필요한 것 같다. 진심을 내뱉을 용기만큼이나 주어에 서술어를 갖다 붙이듯, 내뱉은 말에 상응하는 액션을 할 용기가 중요하다고 느낀다. 그것 없이는 어떤 진심의 제안도 결국 빈말이 된다는 것을 자주 실감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