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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Oct 20. 2021

부산, 근데 이제 영화제를 곁들인…

부산국제영화제

10월 둘째 주, 4박 5일간 부산국제영화제를 다녀왔다. 스스로도 새삼스럽게 신기하지만 처음 가 본 부산이었다. 여행을 가본 바도 없고, 친가 외가를 포함해서 친척집이 모두 경상남도 이곳저곳에 분포해 있는데 부산에는 아무도 없어서 갈 일이 없었던 것이다. 워낙 익숙한 도시 이름이라 가보지 않아도 가본 것 같은 느낌은 있었는데, 막상 여행갈 생각을 하고 보니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에게 부산은 가보지 않은 홋카이도나 상하이와 마찬가지로 막연한 이미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내가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2017년 즈음부터 일종의 숙원사업같은 것이었다. 매년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머릿속으로 부산국제영화제 갈 계획을 어설프게 그렸지만, 시간이 없거나, 돈이 없거나, 연애로 바쁘거나, 휴가가 없거나, 보다 급한 당면과제가 생기거나 하는 등의 여러 이유로 무한히 미뤄지고만 있었다. 다행히 올해는 여러 조건들이 맞아서 갈 수 있었다. 


하루에 영화 두 편씩. 느지막이 일어나서 점심에 영화를 한 편 보고, 밥을 먹고, 카페에 갔다가 저녁에 영화를 보는 날의 반복이었다. 운 좋게도 원하던 영화의 예매를 거의 성공했기 때문에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돌아다닌 것도 아니고, 영화와 영화 사이의 시간이 애매해서 부산 이곳저곳을 구경하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컨셉이 확실한 일정이었다. 영화의, 영화에 의한, 영화를 위한 여행이랄까. 몹시 만족스러웠다.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 부산을 여행하면서, 좋아하는 감독의 미개봉 영화를 미리 관람하면서 느꼈던 소중한 인상은, ‘내가 생각보다 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자주 많이 보고, 글을 쓰고, 영화를 아주 좋아한다고 대외적으로 말하고 다녔지만 조금 피상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이 여정을 계기로 그간의 막연한 선호가 확신으로 전환되었다. 


둘째 날 밤, 영화의 전당 야외극장에서 저녁 영화를 보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한동안 나를 푹 잠기게 했던 영화의 스토리가 너무 좋아서, 연출부터 촬영에 이르는 영화의 모든 요소가 너무 좋아서, 영화라는 매체가 너무 좋아서, 영화를 보는 내가 너무 좋아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알콜이라든가 마약을 때려 넣은 것처럼 심장이 뛰고 호흡이 가빠졌다. 자기 전까지 계속 그러했다.


좋은 이야기는 사람을 점진적으로, 필연코 변화시키는 것 같다. 매사 냉소적이고 이성적이고 무덤덤하게 예술작품을 감상했던 나는, 이제 영화를 보고 곧잘 우는 사람이 되었다. 좋은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가만히 앉아 호흡을 가다듬는 사람이 되었다. 며칠, 몇 달, 몇 년 씩 드문드문 떠오르는 여러 영화의 장면을 곱씹고, 그 상황에 나를 대입해서 큐브를 맞추듯 답을 찾아보는 사람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 생긴 변화가 아니라, 영화에 나를 많이 노출시킨 결과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영화를 많이 봐서 좋은 사람이 되었느냐고 물으면 그건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겠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냐고 물으면 맞다고, 그렇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나의 욕망에 자주 매몰되고, 이기적이고, 까칠한 사람이지만 앞으로 접할 수많은 영화와 시간들이 나를 점차 더 좋은 사람으로 이끄리라는 것을 안다. 아름다운 도시 부산, 미리 만난 좋은 영화들과 함께한 시간 속에서. 해운대의 모래가 언젠가 모두 암석이었듯이, 앞으로의 나도 좋은 방향으로 깎이고 다듬어질 것 같다는 희망적인 기분을 느끼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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