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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Sep 19. 2021

'모이통'을 아시나요

타인은 낯선 땅

집집마다, 사람마다 고유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게 신기할 때가 있다.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묘하게 다른 그 문화나 생활양식 때문에 타인은 마치 낯선 땅, 이국(異國)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서울과 오래 왕래가 끊어진 어느 시골 지역을 여행하는 것 같다.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를 공유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문법으로 작동하는 세상. 이를테면 서로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이 다르다. 화장실에 휴지를 거는 법, 샤워를 하는 순서, 설거지를 하는 순서, 라면을 끓이는 순서라든가, 방청소의 주기같은 것들. 맞고 틀리고의 영역이 아닌 자연스러운 차이들.


가족을 부르는 호칭도 집집마다 다르더라. 우리 집은 어릴 때부터 이모들을 구분하기 위해 울산이모, 인천이모, 서울이모같이 이모 앞에 지명을 붙였다. 친구에게 들었더니 자기네는 왕이모, 큰이모, 둘째이모, 셋째이모… 이런 식이라 했다. '첫째'이모부터 시작되는게 아니라 '왕', '큰', 으로 시작되는 순서가 어딘가 이상했지만 특색있어 재밌다고 생각했다. 어느 집은 숙희이모, 연지이모, 유미이모처럼 이름을 붙인다고 하더라. 이모를 부르는 방법도 집집마다 다르구나.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이 다른 집에 비해 특이했던 경우도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마을버스를 타고 등교하던 때의 이야기다. 운임이 백 원이던 시절이었다. 나와 형에게 아침마다 백 원씩 챙겨주기가 번거로우니, 부모님은 현관에 머그컵을 하나 두고 거기에 백 원 짜리를 잔뜩 채워주셨다. 엄마는 그걸 ‘모이통’이라고 불렀다. 조그만 우리 형제가 아침마다 백 원 짜리를 두 개씩 챙겨가는 모습이 병아리들이 모이를 챙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의 작명이었다. 우리 집에서 '모이통'의 존재가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다른 모든 집의 현관에도 '모이통'이 있는 줄 알았다. 언젠가 친구랑 노는데 동전이 없다기에, 집에 잠깐 들어가 모이통에서 동전을 좀 챙겨오라고 했더니 친구가 갸웃거리며 묻는 것이었다.


“모이통이 뭔데?”

“문 앞에 동전통 있잖아.”

“우리집은 그런 거 없는데?”


모이통이 없다니. 당시의 나에게는, 마치 집에 화장실이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우리집에 있는 건 친구집에도 있고, 친구집에 있는 건 당연히 우리집에도 있는 줄 알았으니까. 친구는 모이통이라는 이름이 재밌다고 했다. 나는 모이통이라는 이름을 다시 곱씹어보고서, “그러네. 조금 웃기네.” 대답했다. 친구의 눈에는 모이통을 자연스럽게 발음하는 내가 되게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요새는 타인을 이해하고 가늠하는 일이 여행처럼 느껴진다. 기분좋은 호기심이 솟아날때도 있지만, 두렵고 거북하게 느껴질 때도 잦으니까.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타인의 세계는 나름의 방식으로 단단해지고 세분화되는 듯하다. 때로는 낯선 이방의 땅처럼 여행하기가 힘들 때도 많다. 각자의 취향과 주관이 너무 확고해지다보니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하기가 힘든 삶의 태도들 또한 적지 않다. 때로는 이걸 복수정답으로 인정해야하나 오답처리해야하나 고민하기도 한다.


그래도 어찌할 도리는 없다. 나는 평생 여행자의 마음으로 입국심사를 받고, 그들의 세계에서 두리번거려야 한다. 때로는 대책없이 믿어보기도 하고, 호기롭게 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사실 '나'라는 세계에서 상대방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그렇게 억울하거나 마냥 어려울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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