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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Nov 10. 2021

<어나더 레코드> 신세경과 김종관과 서촌

<어나더 레코드> 리뷰

이 글은 Seezn으로부터 ‘관람권’만을 제공받고 작성하였습니다.


얼마전 브런치를 통해 제안 메일이 도착했다. [Seezn] OTT에서 공개하는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어나더 레코드>를 보고 리뷰를 작성해달라는 것. 무슨 내용인가 훑어봤는데 흠칫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촌을 배경으로 하는, 김종관 감독의, 신세경이 출연하는 다큐멘터리라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1. 신세경


학창시절 내내 이상한 허세가 있었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한심해하고, 유치해했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뒷자리에 앉아 락음악만 들으며 지냈다. 그러다가 난생 처음 좋아하게 된 연예인이 있었는데, 신세경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방영했던 <지붕뚫고 하이킥>을 정말 심각하게 좋아했었는데, 드라마에 몰입할 수록 <지붕킥>에 나오는 시골소녀 ‘신세경’이 자꾸만 좋아지는 거였다.

그때의 마음은 거의 상사병과 같았다. 신세경만 보면 심장이 뛰었다. 핸드폰, 전자사전, mp3, 컴퓨터 바탕화면을 모두 신세경 사진으로 도배했고, 인터넷에서 그녀의 거의 모든 사진을 찾아 모았다.  ‘신세경을 위해 죽을 수도 있어’같은 말을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했다.

<지붕킥>의 엔딩은 유명하다. ‘이지훈’역의 최다니엘과, ‘신세경’역의 신세경이 공항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는다. 반 년 동안 내가 온몸을 다해 좋아했던 드라마가 새드엔딩으로 끝나고, 극중 신세경이 죽었을 때. 나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참을 수 없는 분노감에 휩싸였다. 이불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질렀다. 이불과 베개를 놓고 주먹질을 했다. (사실 지금도 분이 안 풀린다.)

극 중 ‘신세경’이 죽자, 배우 신세경에 대한 마음도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마법이라도 풀린 기분이었다. 그 이후로 연예인을 좋아해본 적이 없어서 누군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냐고 물으면 언제나 없다고만 대답했다. 좋아해본 적도 없었냐고 물으면 그제서야 신세경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그 당시의 나와, 지붕킥의 신세경이 떠오르며 조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뭐랄까. 좋아하는 마음에도 여운이란게 있는 것 같다.


2. 김종관


영화를 1년에 200편씩 보던 대학원 재학 시절, 우연히 <최악의 하루>를 보게 됐다. ‘한국에 이런 영화가 있네.’ 당시에 김종관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영화는 흠칫 놀랄만큼 좋았던 기억이 난다. 검색을 해보니, 한국 단편영화계의 거장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나름의 작품세계가 있는 사람이었다. <폴라로이드 작동법>은 그의 정말 짧은 단편인데 안보신 분들이 혹 계신다면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다. (정유미의 첫 주연 데뷔작이기도 하다) 짝사랑의 섬세한 결을 그렇게 잘 표현한 작품은 드물다고 생각한다.

<최악의 하루> 이후 김종관의 거의 모든 영화를 찾아보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영화감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한 명만 꼽으래도 김종관을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더 테이블>에서 한예리와 김혜옥 배우가 나오는 씬은 심심하면 돌려본다.

“우리 느림보 거북이… 잘 부탁드려요…”하는 김혜옥 배우의 대사는 언제 봐도 눈물이 찔끔 나온다.


3. 서촌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을 하나만 뽑으라면 혜화의 ‘낙산공원’이라 하겠지만, 그 다음을 말할 기회까지 준다면 ‘서촌’이라 말할 것 같다. ‘서촌’에는 <문화복합공간 에무>가 있어 영화를 보러 한달에 두 번은 들르게 된다. 최근에는 서촌 주택가에 친구가 자취방을 얻어 더 갈 일이 많아졌다. 서촌은 아름다운 동네다. 큰도로에서 한두겹만 안쪽으로 들어가도 신기할 정도로 조용해진다. 서울이 아닌 것처럼 조용하고, 서울이 아닌 것처럼 평화로운 분위기다. 아기자기한 가게들도 많다. 취향이 잔뜩 반영된, 여러 Bar와 카페들이 즐비하고, 오래된 삼계탕집이라든가 전집도 많다. 서울의 거의 중심부에 있으면서도(중심부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즈넉하고 아날로그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서촌의 매력은 직접 가보기 전에는 표현하기 어렵다.


4. 어나더레코드


<어나더 레코드>에서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좋아했던 배우가, 자신의 고민과 문제를 품에 안고 내가 좋아하는 서촌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서촌의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기준에서는 조금 삐뚤어진, 괴짜같은 사람들이다. 돈벌이가 안되는 사업을 하고, 독특한 생각을 하고, 주관이 지나치게 뚜렷한 사람들. 주관식 시험 답안지에 정답 말고 이상한 것을 적어 내는 사람들처럼 느껴지지만 묘하게 응원하고 싶어지는 마음도 덩달아 든다. 갈비찜에 갈비가 맛있다고 갈비만 넣으면 음식이 되나? 무도 있고, 당근도 있고, 양파도 있어야지. 되게 당연한 얘긴데, 실제로 이 사회가 무, 당근, 양파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다 못해 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효율적인 일만 하고, 돈 되는 생각만 하라고 서로서로 눈치주고 괴롭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서촌에서 자기답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꾸만 들었다.

영화를 보면 혼자서 계속 되묻게 된다. ‘야 서댐. 너 저 사람 무모하다고, 철없다고 생각했지? 돈도 안 되는 거 왜 하냐고 생각했지?’ 하면서 뜨끔뜨끔하는 것이다.

신세경이 인터뷰를 한다는 건 그녀가 배우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연기야 말로 그렇지 않나. 좋다는 마음만으로도 할 수 없고, 돈 벌려고 억지로 할 수만도 없는, 기술과 예술의 경계에 있는 일이니까. 그녀는 아마 서촌의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어나더 레코드>를 보면 그 마음이 어느 정도는 내게도 전달이 된다.


<어나더 레코드>는 솔직히 말하면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작품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서촌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김종관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신세경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라서… 꽤나 많은 사람들에게 운명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은 내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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