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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Nov 28. 2021

박우리가 함자영을 만났을 때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 리뷰

나는 정가영 감독의 전작 <하트>의 리뷰를 작성하면서 그녀의 매력을 쌀국수에 비유한 바 있다. 호불호가 뚜렷하지만, 분명한 색깔과 매력이 있는 그녀의 영화가 마치 쌀국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무 솔직하고 과감해서 누군가는 인상을 찌푸릴수도 있지만, 나는 정가영식의 영화가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캐스팅과 줄거리만 봐도, 영화 내용이 줄줄 떠오르는 영화는 이제 너무 지겹다.


이번 <연애 빠진 로맨스>는 전작들과는 달리, 상업영화인 만큼 한층 대중적인 맛으로 변했다. 여기엔 장단점이 있는데, 장점이라면 여전히 정가영 식으로 신선하다는 것이고, 단점이라면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조금 진부해졌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누군가는 실망했을수도 있겠지만 상업영화의 공식을 꽤나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점은 대다수에게 호응을 얻을 만하다.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은 쌀국수라기보다는 마라탕(매운맛 1단계)에 가깝게 느껴졌다. 개성은 뛰어나지만 생각보다 진입장벽이 낮은,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한국식 마라탕.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남녀가 데이팅 어플로 만나서 사귀기도 전에 섹스를 하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파국을 극복하고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처럼 상반된 매력의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전제조건이 있다면 두 남녀가 정말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연빠로>는 이를 성공적으로 구현해낸다. 전종서와 손석구의 캐스팅은 거의 신의 한수라고 할만큼 훌륭했다. 영화보기 전에는 전종서에게 빠질 준비를 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손석구의 연기가 더 돋보였다.


<멜로가 체질>이라든지 <D.P.>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손석구의 연기는 나름대로 독보적인 구석이 있다. 일단 적힌 대사를 외워 읽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스스로 ‘나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대사 표현방법을 다듬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건성건성, 툭툭 내뱉는 듯한, 껄렁거리는 듯한, 능글맞은 말투를 극중 박우리에 너무 잘 입혔다.


전종서 연기도 훌륭했다. 전종서의 얼굴을 빌려 말하는 정가영 감독이 보이지 않을까 우려했었는데, 자신의 매력으로 꽉 채운 전종서의 함자영으로 빛났다. 과감하고 솔직한 대사들의 말맛을 잘 살린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연애 빠진 로맨스>라는 제목을 곱씹어 보았다. 이게 처음에는 되게 도발적이고 이상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로맨스에 연애가 빠지면 안되나? 문제라면 로맨스 빠진 연애가 문제인 것이지, 연애가 빠진 로맨스가 무엇이 문제일까? ‘만남-연애-결혼’이라는 현실적인 절차가 오히려 마음보다 우선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기분도 들었다. 억지로 연애를 조장하고, 적령기에 서둘러 결혼을 하는 이 세상이 문제라면 문제이지. 솔직하게 만나서 좋아진 후에야 연애를 결정하는 자영과 우리는, 사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만남의 단계를 거치고 있는 거였다. 사랑을 하다 보면 그게 연애가 되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난 후 여기저기서 반응을 살펴보았을 때, 이 이야기가 2030의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어느 정도 있는 하다. 내 생각에는 이런 관점이 오해같다. 내 생각에 <연애 빠진 로맨스>는 오히려 특수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데이팅 어플을 사용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그와 무관하게 살아갈 뿐더러 '우리'나 '자영'처럼 솔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요즘 애들은 쿨한척 가볍고 문란하게 노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당대성을 잘 살린 굉장히 특수한 이야기로 바라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연빠로>는 명작이 아니고, 아마 감독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더 유쾌하고 소중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매일 미슐랭 3스타 식당에서 밥을 먹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영화가 마스터피스일 필요는 없다. 살다보면 분식도 땡기고 패스트푸드도 땡기는 법인데, 정직한 식재료를 썼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나. 정가영은 엽기떡볶이같은 매력의 영화를 이번에도 잘 차려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고 잉여생산물을 축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역사에는 전업 예술가가 등장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자 재주있는 몇 사람에게 예술만 할 자유를 선물한 것이다. 정가영이야 말로 이에 부합하는, 농사를 짓지 않고 엉뚱한 무엇이든 할 자격이 있는 사람 같다. 이집트 시대에 태어났어도 그녀는 예술을 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전작 <하트>의 리뷰에서, 앞으로도 그녀의 신작을 열심히 찾아보겠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 마음은 여전하다. 쌀국수에서 마라탕으로 변모한 그녀의 영화가 다음에는 또 무슨 맛으로 관객을 찾아올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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