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에는 116편의 영화를 보았다. 단편영화가 몇 편 있으니 대략 장편기준으로 110편 정도를 보았다고 치면 될 것 같다. 게으르게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세어놓고 보니 꽤 많아 보인다. 영화 많이 보는 게 무슨 자랑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무엇이든 차곡차곡 쌓아두는 기분, 그걸 확인하는 기분은 나쁘지 않다.
내가 영화를 왜 보는지,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보는지는 지난 몇 년간 여러 번 적었기 때문에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다만 오늘은 ‘잊어버린 영화’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 해보고 싶다.
영화를 수 년 간 수 백 편씩 보다 보면,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난다. 대부분의 영화가 관람여부와 함께 대충 어떤 이야기였다는 것만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누구에게 그 영화를 보았다고 말은 하는데, 어떤 영화였고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장면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지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영화들도 엄청나게 많다. 그럴 때면 그 영화를 내가 봤다고 해도 되는지, 나를 잠시 스치고 사라져버린 그 영화들이 무슨 의미가 있기는 한지 회의감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잊어버린 영화는 무엇이 되는가. 나는 잊어버린 영화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문득 내 오랜 친구들을 떠올렸다. 특히나 학창시절 만난 친구들과는 정말 지독하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사실 그들과 보낸 대부분의 시간들은 기억의 저편에 고이 잠들어있다. 어떤 계기로 숨어있던 기억들이 끄집어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력으로 되살릴 수 없는 사라진 기억들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 잊힌 수많은 시간의 총량이, 친구라는 관계의 뿌리가 된다. 그러니까 관계에는, 무의미하게 함께 보낸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기억나지 않는 그 수많은 날들이 쌓이고 쌓여서 관계의 어느 부분을 지탱하기 때문에, 한동안 만나지 않더라도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이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도 취향이나 가치관,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이 있다. 함께 일을 하거나 프로젝트를 할 때는 친하게 지내다가도, 몸이 멀어지는 만큼 별 수 없이 멀어지는 관계들이다. 나는 그 이유를 함께 보낸 무의미한 시간의 총량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한다. 함께 보냈으나 기억 나지 않는 그 무수한 시간들이 없다면, 베이스 없는 락밴드처럼 중심을 쉽게 잃고 마는 것 같다.
잊어버린 영화들도 마음 저변에 넓게 깔려 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다른 기억들과 융합되거나, 다른 작품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내 사상을 조금씩 바꾸고, 내 결정에 은밀히 관여하고, 얇은 렌즈처럼 티 안나게 내 눈을 덮고 있다.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한참 뒤에 여파가 밀려오기도 한다.
보았지만 기억나지 않는 영화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가라앉아 있다. 기억나지 않아도, 나를 이루고 있다. 기억나지 않는 영화가 없다면, 지금의 내 모든 관점과 가치관도 없다. 그러니까 모든 영화를 기억하려 노력할 필요는 생각이 든다. 가라앉은 추억들이 관계를 단단히 유지하듯, 가라앉은 영화들이 내 정신을 단단히 채워주고 있으니까.
내일 모레면 새해다. 또 어떤 좋은 영화들이 나를 찾아올 지, 기대가 된다. 적어도 몇 편은 내 인생을, 정신을 온통 뒤흔들 것이다. 매년 그런 작품들이 있었다. 확정된 미래다. 죽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나를 찾아오고, 흔들고, 잊힐까. 설렌다. 내년에도 좋은 영화를 많이 보아야겠다. 잊어버릴 영화를 많이 보아야겠다.
커버 사진은 올 한 해 본 영화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더 레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