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Dec 05. 2021

가수는 아니지만 노래에 진심입니다

책이 없는 작가, 앨범이 없는 가수, 나.

나는 물론 가수가 아니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가수라고 생각하면서 산다.




특정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다 보면, 보통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디테일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경지에 다다르면 정말 짜릿하다. 나는 위스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위스키 맛은 비싼 것이든, 싼 것이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떤 것을 먹어도 다 타이어를 알콜에 달인 맛처럼 느낀다. 패션에 대해서도 그렇다. 패션 유튜버가 구독자들의 코디를 평가해주는 영상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핏을 잘 뺐네요." "무난한 아이템인데 디테일이 되게 좋네요." 하는 말들은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들이 공유하는 어떤 패션 문법 같은 게 있는 모양인데, 나로서는 그 섬세한 결을 감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나는 영화나, 문학, 노래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를 무척 뿌듯하게 여긴다. 이러한 특유의 감각은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어떤 기점 이후로 획득한 감각이다. 위스키를 처음 먹는 사람이 위스키의 복잡함을 이해할 수 없듯이, 노래도 그냥 듣고 불러서는 그 깊은 디테일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하나의 계기로 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얻었고, 그날부터 스스로를 가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2011년의 여름이었다.


1학년 내내 학과 친구들하고만 어울렸던 나는 2학년이 된 후, 꽤나 용기를 내서 음악 동아리에 들어갔다. 들어가는 과정이 쉽지도 않았다. 나름 20년 이상의 전통이 있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아리였기 때문에 면접부터 까다로웠다. "같은 학번이라도 윗 기수면 선배 대접을 해야 하는데 괜찮겠냐" "공연 준비 기간에는 주말 내내 연습에 참여해야 한다." "학과 활동보다 무조건 동아리 활동을 우선해야 한다"는 등의 엄포가 이어졌다.


막상 가입을 하고 나니, 우려했던 것만큼 딱딱하지는 않았다. 동갑인 윗 기수 친구에게 선배님이라고 부를 일도 없었고, 주말 연습이나 봉사활동도 사정이 있을 때는 빠질 수 있었다. 동아리 회장 형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선배들은 나를 꽤나 아껴주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기타를 치면서 자작곡을 만들곤 했는데, 매일 방에서 혼자 부르던 내 자작곡을 동아리 사람들은 참 좋아해 주었다. 내 노래를 유행가처럼 따라 부르거나 연습하고, 몇몇은 자신의 핸드폰에 녹음해가기도 했다. 매일매일이 즐거운 나날이었다.


문제의 날은 기말고사 시험기간 즈음이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잠깐 기타나 치며 쉬려고 동아리 방에 들렀다. 시험기간의 동아리방은 평소보다 더 왁자지껄,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는데, 그날은 조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 학번 위의 누나만 있었다. 온화하고 웃음이 많던 누나는 의자에 앉아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오자 유난히 반가워했다. 우리는 잠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놀았다. 할 말도 떨어지고 조금 어색해지려는 찰나, 누나가 말했다.


"서댐아, 나 그거 불러줄 수 있어?"
"어떤 거요?"
"너 노래 중에 '고양이' 그거 듣고 싶어."


'고양이'는 내가 만든 노래 중 하나였는데,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노래였다. 아주 가끔 혼자서 조용히 불렀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노래를 누나가 신청한 것이었다. 내심 기뻤다. 나는 기타를 안고 코드를 잡았다. 누나는 가만히 앉아서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나는 비싼 도자기를 조심스럽게 닦듯이 한 음 한 음 신경 쓰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왜 넌 울고 있는 거니, 왜 넌 슬퍼하는 거니, 너의 마음도 나와 같이 옆으로 굽었구나.'


그리고 마지막 후렴을 부르고 있을 때, 누나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 작은 동아리방, 번들거리고 지직거리는 형광등 불빛, 따뜻하게 울리는 기타 소리, 나의 목소리, 마주 앉은 나와 누나. 그 모든 분위기가 무슨 영화처럼 느껴졌다. 내 앞의 누나는 울고 있었다. 내 노래를 듣고 울다니, 생전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소름이 돋고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노래가 끝난 후에도 누나는 옷소매로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왜 우는지, 무슨 일이 있는지. 그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누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고, 곧 가방을 챙겨 나갔다.


혼자 남겨진 그 조용한 동아리방에서, 나는 가수가 된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노래가 누군가를 울릴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자 덜컥 무서워졌다. 그러고 보니 노래가 무엇인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노래를 부르는 자세도, 듣는 자세도 완전히 바뀌었다. 노래는 단순히 음정 박자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악보에 없는 것을 나름대로의 의지로 표현하는 과정이었다. 어떤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걸 알고 노래 부르는 이와 흉내 내는 사람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곡을 '해석'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비로소 이해되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나의 이 글이 굉장히 우습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노래에 누가 울었다고 가수가 된 것 같다는 둥, 무슨 새로운 감각을 얻었다느니, 감정을 담아낸다느니, 곡 해석이 어쩌고... 하는 말들이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꽤 진지한 자세로 적었다. 책 한 권을 내지 않았지만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날 이후로 나는 스스로를 가수라고 생각한다. 죽을 때까지 아무도 인정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2016년 대학교 졸업반 시절의 영상을 오랜만에 페이스북에서 발견했다.(기타와 마이크가 있어 자주 찾던 호프집)

라식수술을 해서, 저 뿔테 안경과는 이별했지만, 나는 여전히 저 안경을 쓰고 기타를 치던 때의 내가 익숙하다.

노래는 Sam Smith의 <I'm Not The Only One>. 애창곡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욘더로드> 오감을 동원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