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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an 18. 2022

글이 막힐 때는 군대 이야기

훈련소에서 폐렴이라니

“오빠 언제 전역할 거야?”라는 말은 아직도 생생하다. 2013년 전역 직후 사귄 여자 친구에게 내가 틈만 나면 군대 얘기를 해대자, 참다못한 여자친구가 내뱉은 말이었다. 내 군대 얘기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아주 재밌는 편인데도(많은 구독자님들이 인정을 해주셨다. 진짜로), 여자친구는 결국 질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군대 얘기 안 하려면 기억도 안 나는 까마득한 2년 전 이야기를 해야 해. 네가 이해를 좀 해 줘.”

하고 대답했는데 그때만 해도 별로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누구나 오늘, 저번 주, 저번 달 있었던 얘기 하지, 막 2년 전 얘기를 오늘 일처럼 하지는 않으니까. 그때는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군대 얘기가 가장 최신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문제는 전역한 지 10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도 내가 틈만 나면 군대 얘기를 한다는 것이다. 군대 안 갔다 왔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군대에서 에피소드 건진 것만 해도 뽕을 뽑은 것만 같은 기분이다. (아마 나는 공익근무를 했어도, 마침내 근무지가 해병대만큼이나 힘들었다고 허풍을 쳤을 것이 뻔하기는 하다)


요즘 잠을 못 잤더니 컨디션도 안 좋고, 오늘은 목도 간질간질하던데. 훈련소에서 폐렴 걸린 것이 문득 생각이 났다. 1월 들어 글을 영 못쓰고 있어서, 새해 다짐 같은 것을 좀 써보려고 했는데 역시 글은 억지로 쓰려면 영 써지지가 않는다. 이럴 때는 나만의 슬럼프 극복 방법인 군대 얘기밖에 없다는 생각에 폐렴 얘기로 틀었다.


2011년 10월, 평소에도 잔병치레 잦은 나는 환절기를 이기지 못하고 훈련소에 들어가자마자 감기가 걸렸다. 사실 거기까지는 딱히 놀랄 일도 아니다. 환절기에 훈련소는 감기의 온상이라 거의 절반 이상이 집단으로 걸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손을 제대로 씻을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좁은 침상에서 십 수명이 다닥다닥 붙어서 자다 보니 전염은 예사였다.


그런데 가혹한 환경에서 완치된 줄 알았던 천식이 도진 모양인지, 숨쉬기가 어려웠고, 기침은 점차 심해졌다. 감기라고 하기에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의무대에 간신히 한 번 갈 수 있었지만, 성의 없는 진료에 일괄적인 진통제 처방이 전부였고 이후로도 나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훈련소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 되자 하늘이 핑핑 돌고,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기침이 한 번씩 나오기 시작했다. 기침하느라 잠은 거의 잘 수가 없었다. 동기들의 응원에 힘입어 나는 일과 종료 후 의무대 진료에 지원했다. 조교들은 중앙현관에 모인 수십 명의 환자들을 생활관으로 돌려보내기 바빴다.


“야이 새끼들아. 사회에서 이 시간에 감기로 응급실 가냐? 왜 군대만 오면 애새끼가 되는 거야!”

소리를 칠 때마다 훈련병들은 다섯 명, 열 명씩 생활관으로 흩어졌고 나도 그렇게 세 번이나 돌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기침을 이길 수가 없었다.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193번 훈련병 넌 왜 안 들어가?”

“저… 기침이 너무 심합니다”

“감기네?”

“예, 그런데 기침이 너무 심해서”

“그러니까 감기잖아”

“예 그렇긴 한데… 숨을 쉬기가 힘듭니다.”

“감기 가지고 엄살떨 거야?”


대화는 걷잡을 수 없이 삭막해지는데, 그날은 차라리 한 대 맞겠다는 각오로 뻐겼다. 한참 깐족거리며 나를 갈구던 조교는 요즘 애들이 어떻느니 하면서(몇 살 차이나지도 않으면서) 끝내는 나를 의무대 줄 쪽으로 세워주었다.


진료받기 전에 조교가 체온계를 내밀었다. 나는 전혀 열이 없었기 때문에 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절차라고 하기에 귀를 갖다 댔다. 체온이 표시되자 조교의 눈이 커졌고, 나는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조교는 자기 귀에 체온계를 눌러보더니, 온도를 확인하고 내 체온을 3번이나 더 쟀다.


내 체온은 38.7도였다. 기침이 워낙 심해서 열이 오른 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군의관은 그제야 나를 제대로 진료하기 시작했고, 중사 한 명을 붙여서 사단 의무대로 이동시켰다.


사단 의무대에 도착하자 잠에 들락말락한 군의관이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나를 맞았다. 청진기를 배에 대더니 고개를 자꾸만 갸웃했다.

“어?”

청진기를 왼쪽 쇄골부터 오른쪽 아랫배까지 수십 번을 갖다 대더니, 그마저도 부족했는데 등 이곳저곳에 대고 청진하기 시작했다.


“이상한데? X레이 한번 찍어보자.”


X레이 결과는 바로 나왔다.


“폐렴 같은데요? 분당 수도병원으로 바로 후송해야 됩니다.”


폐렴 진단을 받자마자 어지럼증이 머리를 휘감았다. 열도 느껴졌고, 숨을 쉴 때마다 목에서 걸리는 기침이 더 아프게 느껴졌다. 폐렴이라니. 그거 오헨리 마지막 잎새에서나 나오는 병 아니었나? 억울함과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폐렴에 걸린 채로 3km 뜀걸음을 했다니. 폐렴에 걸린 채로 수류탄을 던졌다니, 폐렴에 걸린 채로 각개전투를 했다니.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분당 수도병원에서는 MRI인지 CT인지를 찍었다. 감기로 시작했는데, 제때 치료를 못 받아서 기관지염이 되었고, 그게 다시 폐렴이 된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폐렴은 무서운 병이었지만, 허탈함도 주었다. 내가 폐렴 진단을 받은 날이 금요일이었는데, 폐렴 약을 먹고 주말 동안 잠만 잤더니 깨끗이 나았다. 이렇게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을 3주 가까이 방치하다니. 돌로 조교들 머리라도 찍어버리고 싶었다. 동기들은 다 죽어가던 내가 이틀 만에 새사람이 되어 오니, 무슨 나사로가 살아 돌아온 것을 본 것처럼 믿기 힘들어했다. 걷고 달리는 일이 그렇게 힘에 부쳤는데, 숨만 편히 쉴 수 있어도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훈련소에서 아팠던 기억이 너무 서러웠고, 한편으로 또 슬펐기 때문에 전역 후에 나는 남자 동생들이 입대할 때마다 편지를 써주던 자상한 선배가 되었다. 내가 겪었던 외로움과 슬픔을 동생들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그야말로 동병상련의 마음이었다. 사람이 아프면 깨닫는 바가 참 많은 법이다.


생각해보면 폐렴 약을 먹으며 의무대에 누워있는 주말 동안, 나는 엄청 효자도 되었다가, 인격자도 되었다가 철학자도 되었다. 폐렴에 걸리지 않았다면 한 번도 해보지 못했을 감정이입도 많이 해보았다.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폐렴에 걸린 경험이 모조리 나빴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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