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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an 31. 2022

자신을 대접하는 능력

'유난'을 떨어야 하는 이유

문명이냐 야만이냐는, 냉장고에서 반찬통 꺼내 그대로 먹느냐, 아니면 예쁜 접시에 덜어먹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 김영민, 『설거지의 이론과 실천』 中 -


유난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뱉을 때가 있었다. 그게 남자다운 것인 줄 알았다. 대충 해, 대충 줘, 대충 먹어, 대충 입어. 뭐든지 대충대충. 가성비, 효율, 빠르게, 간단히. 그게 남자들의 세계였다.


동창들과 여행이라도 가면, 과자를 아무렇게나 뜯어가지고 가운데에 풀어놓고, 다들 제각기 반바지에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담배 피우는 녀석들은 재가 어디 떨어지는지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뻐끔뻐끔 연기를 내뱉고, 보드게임을 몇 바퀴 돌리거나 카드를 치고,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그대로 뻗어서 자는. 누가 음식에 플레이팅이라도 할라치면 뭘 그렇게 답답하게 하고 있냐고 면박을 주는, 늘 그런 식이었다.


방송작가였던 여자친구 H를 만났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유난’이라는 것은 삶의 멋이었다. 나보다 몇 살이나 어렸지만, H는 자기 자신을 대접할 줄 아는 여자였다. 집에서는 언제나 은은한 간접등을 켜놓았고, 외출하고 돌아오면 인센스 스틱에 먼저 불을 붙였다. 흰색 스탠드형 CD플레이어가 탁자 위에 놓여있었는데, 기분에 따라 앨범을 골라서 음악을 적당한 볼륨으로 상시 틀어놓았다. 좋아하는 술들을 냉장고 위에 쌓아놓고 마셨다. 내가 놀러가면 귀한 손님이 온 날이라면서, 괜찮은 와인이나 위스키, 헨드릭스 진 같은 술을 꺼내주었다. (나는 술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그냥 타이어를 알콜에 달인 맛이 난다 했다.) 항상 이런 저런 에세이나 소설 책을 읽었고, 꾸준히 일기를 썼고, 자기가 쓴 글들을 모아 단권으로 엮어 보관하기도 했다. 퇴근하면 항상 헬스장에 들렀다가, 끝나고 돌아오면 샤워를 한 뒤 손수 요리를 해먹었다. 예쁜 접시에 예쁘게 담아서 먹었다.


좋아하는 담배를 기분 좋게 피우고 들어오면 인상이 환해졌다. 나는 재미없는 서울 촌놈이라, 봄여름가을겨울 맥도날드 햄버거인데, H는 계절마다 제철음식을 잘도 챙겨 먹었다. 내년 여름에는 장어를 먹으라고, 가을이니까 갈치를 먹어야 한다고. 이건 이렇게 먹어야 한다고, 저건 저렇게 먹어야 한다고. 서울 구석구석 아는 맛집도 많았다. 집 근처에도 단골집이 많았다. 홍대에서 자취하던 그녀는 홍대에서 자취하기로 하고 태어난 사람처럼 그 동네와 잘 어울렸다. 짧은 연애였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씩 그 때를 은은한 여운으로 기억하게 된다.


그녀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유난이라든가 허세라든가 하는 단어가 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자신을 대접하는, 자신의 삶을 존중하는 태도였다. 비슷한 것을 먹어도. 그녀와 나의 삶은 질적으로 다른 거였다. 그녀는 한 끼 식사를 하고, 나는 한 끼를 그냥 때운 거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반복되는 질문 속에서, 이런저런 사람들과의 만남은 새로운 영감을 주기도 한다. 미래를 잘 계획해서 목표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해상도를 열심히 올리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그녀를 통하여 새삼 무겁게 깨달았다.


나는 ‘유난’떨지 않으려고 얼마나 많은 디테일을 놓치고 살았을까. ‘쿨하다’는 명목으로 얼마나 많은 섬세한 즐거움을 뭉개고 있었나. 요즘의 나는 삶의 색상표을 넓히기 위해서 부단히 의식하는 중이다. 그것이 ‘허세’가 되지 않도록 남에게 자랑하거나 뽐내는 것을 삼가면서. 오로지 나를 위해서 자주 애쓰고, 열심히 취향을 갈고 닦는다. 흑백 텔레비젼같은 삶이 되지 않도록, 컬러풀한 매순간을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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