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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pr 19. 2022

라디오 속을 돌아다니던 그 부품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쓸모

요즘 나는 새로운 직무로 취업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국비교육으로 같은 기수의 동기들과 비슷한 목표를 향해 공부하는데, 이중에서도 내 나이는 꽤나 많은 편이다. 어느 무리에서건 막내 포지션으로 지내는게 자연스러운 때도 많았는데, 요새는 어딜 가더라도 적은 나이가 아니다. 그런 기분이 꽤나 낯설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도 적잖게 부담스럽다. 공자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기 시작해서(志學), 서른 살에 바로 섰다는데(而立). 나는 서른 하나가 되어도 바로 서지 못하고 엉거주춤이다.


세금이니 청약이니 하는 얘기를 듣고 있으면 아직도 초보자 사냥터에서 목검으로 허수아비를 휘두르는 게임 캐릭터가 된 것만 같다. 도로의 외제차라든지, 대기업 출입증을 목걸이로 걸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광장에서 휘황찬란한 전설급 아이템을 두르고 다니는 고렙 유저들을 쳐다보는 기분이다.


어릴 때 집에 라디오가 있었다. 꽤나 두툼한 본체에 카세트 테이프도 넣을 수 있고 시디도 넣을 수 있었는데 정확히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형하고 나는 그걸 보통 라디오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걸 가지고 ‘로봇 본부’라고 명명하고 장난감과 같이 가지고 놀았다. 시디 플레이어 쪽을 열어서 로봇을 뉘어 쉬게 하거나, 카세트 테이프 넣는 곳에 경계병을 배치하는 식이었다.


가끔은 코드를 꼽고 라디오를 틀어놓기도 했다. 주파수를 바꿀 때마다 소리가 달라지는 것이 신기했다. 일부러 주파수를 엉망으로 맞춰놓고 지직거리는 소리를 백색소음처럼 가만히 듣고 있을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은 한바탕 놀이가 끝나고 나서 묵직한 라디오를 다시 제자리로 옮겨 놓으려는데, ‘투둑’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집으니까 다시 ‘투둑’했다. 양손으로 라디오를 흔들자 ‘투두두둑’하는 플라스틱 구르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알 수 없는 부품이 라디오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아서, 라디오를 처분할 때까지 그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안에서 굴러다니는 저 알 수 없는 부품도 분명 필요해서 넣어둔 것일 텐데, 왜 저 부품이 빠져 있는데도 고장이 안 나지?’


엄지손가락 크기 정도는 되어 보이는 부품이었는데, 그게 빠져서 라디오 안을 마구 돌아다녀도 기능상에는 어떤 문제도 없었던 것이다. 라디오도 잘 작동이 되었고, 시디를 넣어도, 테이프를 넣어도 음악은 잘만 재생되었다. 그 부품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아무것도 정해진 바 없이 취업준비를 하는 요즘, 나는 그때 그 라디오의 ‘투둑’거리는 부품이 된 것만 같다. 나는 아무 역할 없이 부유하고 있는데도. 이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 내가 없어도 세계의 모든 기능은 정상 작동하고, 그 안에서 ‘투둑’거리는 나의 쓸모는 모호하다. 미래는 언제나 흐릿하니까, 해결되지 않는 불안한 마음도 자주 든다. 긍정적인 자세로,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라고 누가 그러던데,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기도 추억이든 경험이든 무엇이든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일도 다음 달도 또 힘을 내서 살아가려고 한다. 또한 나와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에게 응원의 마음도 전해주고 싶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자리를 찾지 못한 이 세상의 모든 라디오 부품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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