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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y 04. 2022

왜 ‘과거는 나’는 오글거리는가

싸이월드와 흑역사


문화재는 발굴하기도 하지만 발굴되기도 한다. 인터넷 구석구석에 남은 흔적들도 마찬가지다.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도자기가 발견되듯, 우리의 흑역사도 뜻하지 않은 순간에 드러나곤 한다. 사망 판정을 받은 줄 알았던 싸이월드가 얼마 전 지난 자료들을 거의 복원해내고 부활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본 사람들은 애꿎은 이불이나 베개를 걷어차면서 집먼지 진드기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싸이월드를 통해 학창 시절을 들여다보면, 쏟아지는 감정은 부끄러움과 오글거림이다. 내가 쓴 글, 업로드한 사진들도 그렇지만 당시 유행했던 짤들도 만만치 않게 낯부끄럽다. 어떻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오글거리는 글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내고 소비할 수 있었을까. 다시 생각하면 조금 신기한 일이다.


속옷을 입고 길거리를 돌아다닐 수는 없지만 수영복을 입고 해운대를 걸어 다닐 수는 있는 것처럼 집단이 분위기를 만들면 동조하게 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일까. 오글거림이 유행이 될 때 사람들은 손쉽게 동조하게 된다. 틱톡에서 어처구니없는 상황극이 수없이 재생산되는 것도, 우스꽝스러운 춤을 챌린지라는 이름으로 찍어 올리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거대한 문화가 되어버린 행위를 낮잡아 보는 것도 오만한 태도겠지만, 먼 미래에 상당수가 흑역사라는 이름으로 평가될 것이라는 예상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나는 항상 부끄럽고, 글과 사진들은 언제나 흑역사가 되는 걸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교통카드 짤’을 통해 어떤 글이 흑역사가 되는지 알아낼 수 있다.


‘가슴속에 김태연이 살고 있기에 두 명 분의 교통비를 낼 수밖에 없다’ 던 남자는 아마 사랑에 미쳤다기보다는 사랑을 과시하고 싶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진짜 두 명 분의 교통비를 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아해하는 주변의 시선이 궁금했을 것이다. 선망의 반응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는 그녀보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더 사랑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누군가를 너무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미처 몰입하지 못한 이야기다. 이와 같이 불순한 의도로 쓰인 글은 유행이 지나고 사람들이 객관성을 되찾기 시작할 때 여지없이 촌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몇십 년 전의 글과 사진만 부끄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에 쓰인 정철의 '사미인곡' 같은 글도 오글거린다. 자신을 천상계에서 떨어진 선녀에 비유한 중년의 남자라니. 그는 나아가 시조의 마지막에 이렇게 읊조리기까지 한다. ‘차라리 죽어서 호랑나비가 될까요. 날개에 꽃 향기를 담아서 임금님 옷에 묻힐게요. 당신이 나인 줄 모르셔도...’ 중앙 정치로 복귀하고 싶은 그의 절절한 야망이, 온갖 미사여구에 담겨있다. 1588년에 쓰인 이 시는 40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어쩐지 낯부끄럽게 느껴진다.


반면 정철이 자신을 선녀에 비유하기 2년 전인 1586년, 조선시대에는 이런 글도 쓰였다. ‘원이엄마의 편지’로 잘 알려진 글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이 아버님께 올림-(병술년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후략>


이응태의 묘에는 이 편지와 함께 원이 엄마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미투리가 함께 발견되었다. 몇 년의 시간차를 두고 쓰인 ‘원이 엄마의 편지’와 ‘사미인곡’은 완전히 다른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깊은 우울에 잠식되거나, 깊은 슬픔에 잠긴 상태에서 쓰인 글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오글거리지 않는다. 우울이나 슬픔 자체가 오글거림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압도적인 감정 속에서 비로소 우리가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주변을 의식하는 마음이 없다. 유행을 따르지도 않는다.


나보다 남을 의식할 때 우리는 곧잘 촌스러워진다. 타인의 시선과 인정을 의식해서 유행 속에 나를 담글 때, 손쉽게 시류에 편입할 때, 흑역사는 비로소 차곡차곡 생성되는지 모른다. 남을 의식하는 시선이 당장의 나를 좀먹고, 미래의 나를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곱씹어볼 만하다.


나로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 우리는 눈치보기를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고 모든 유행을 유치해하면서, 나 혼자 멀찍이 미래에 홀로 서서 현재를 과거처럼 관망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니. 나와 세계 사이에서 균형감을 가지는 일은 참 어렵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교통카드 짤’은 남의 일일까. 문득 뜨끔해지는 이 순간. 글을 쓰면서도 조심스럽다. 브런치라는 유행 속에서 나는 어떤 오글거림을 창조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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