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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r 21. 2022

가본 적도 없는 곳의 감각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

“그럼 한 번 해볼래요?”


이제는 게임을 거의 하지 않지만, 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게이머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외출만 하셨다하면 온게임넷이나 mbc게임을 무슨 라디오처럼 틀어놓고 살았고, 새벽시간 새로운 게임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집중해서 시청했다. 지금도 각종 게임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유튜브를 수시로 본다. 


2020년 10월, 직장 동료 한 분과 게임 얘기를 했다. 닌텐도 스위치를 취미로 하신다기에, 나도 이런저런 경로로 줏어들은 게임 이야기를 했다. 그게 그렇게 재밌다던데 어떻느냐고. 그것도 해보셨냐고. 그냥 내가 아는 게임들을 나열하는 정도였다. “그럼 한 번 해볼래요?” 하는 제안의 말은 그 대화의 와중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사실 남의 닌텐도를 빌려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브런치에 글도 써야하고. 아무튼 이래저래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닌텐도라는 게 궁금하기도 했고 제안이 감사하기도 해서 일단 알겠다고 했다. 동료분은 닌텐도를 다음날 바로 가져다 주셨다.


“언제까지 드리면 돼요? 일주일?, 이주일?”

“음… 올해 안에만 주세요.”


며칠 재밌게 해보고 반납할 요량이었는데, 대답이 전혀 뜻밖이었다. 이걸 세 달이나 하라고? 평소에도 농담을 자주 하시는 분이어서 장난인가 헷갈렸는데, 전혀 그런 말투가 아니었다. 올해 안이라니… 혼자 속으로 가볍게 웃으면서, 일단 재미있게 해보겠다고. 닌텐도를 받아들었다.


내가 해보겠다고, 그에게서 빌린 게임은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 이라는 실로 유명한 게임이었다. 수많은 게이머와 평론가들 사이에서, 역대 최고의 게임이라고 평가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처음으로 만져보는 닌텐도 게임기의 조작감이 너무나 낯설었지만 이내 적응하게 됐다. 게임 진행은 더디게만 흘러가더니 어느 순간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헐벗은 캐릭터가 옷을 갖춰입기 시작하고, 전투 능력이 상승하자 어느 순간부터는 밤마다 닌텐도를 붙잡게 됐다.


<젤다의 전설> 속 왕국은 광활했다. 모험은 해도해도 끝이 없었다. 여러 무기를 든 채로 숲을, 밀림을, 협곡을, 눈밭을 뛰어다녔고. 마왕 가논을 처치하기 위해서 힘을 길렀다. 비를 피해 동굴에서 쪽잠을 자고, 무기를 얻고, 활을 쏘고, 주민들을 돕고, 요리를 하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때로는 날아다녔고, 때로는 헤엄을 치며 다녔다.


게임을 반납하게 된 건 12월 끝자락이었다. 그마저도 언제쯤 받을 수 있겠냐는 장난반 진담반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정말 한참이나 푹 빠져서 게임을 했다. 그때 만났던 여자친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전화를 하면서도 아이템을 정리하거나 전투에 사용할 요리들을 만든 적이 있었다.


세 달 동안 그 게임을 했던 기억이 지금 와서는 조금 독특하게 추억된다. 내가 닌텐도를 양손으로 잡고 게임을 했던 침대 위의 내 시야로 기억되지 않고, 그 캐릭터의 1인칭 시야로 그 때의 플레이가 기억이 된다. 나는 변함없는 내 작은 방에서 게임을 했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어쩐지 그 마을의 습기와, 냄새와, 촉감이 덩달아 떠오른다. 그 우렁찬 몬스터들의 함성과 땅을 뒤흔들던 진동이 마치 몸으로 겪은 듯 생생하다. 액정 너머로 본 그래픽일 뿐인데 정말 오감으로 되살아난다.


그러고 보면 읽었던 책들도 그랬다. 나는 해리포터를 푹 빠져서 읽었지만, 그 세계와 이야기가 종이와 글자로 기억되지는 않는다. 영화 속 배우와는 사뭇 다른, 오로지 내 상상력이 조합한 인물들의 모습과, 연회장과, 호그와트의 모습이 풍경처럼 떠오른다. 마법을 날리고 맞을 때의 어떤 감각도 아스라이 떠오른다. 나는 아직도 해리포터가 만났던 디멘터의 기분나쁜 냄새를 기억할랑말랑한다.


중학생 때 읽은 <마젤란>도 하염없는 바다와 갈증의 기억으로 남아있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도 천공을 가르던 속도감과 볼끝의 바람으로 기억된다. 모두 내가 온몸으로 겪은 듯한 풍경과 감각으로 떠오른다. 가만히 앉아서 독서를 했을텐데, 흰 종이와 검은 글자들의 기억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간접경험이라는 말이 헷갈린다. 그것들은 정말 간접경험이었을까? 머릿속 기억장치는 직접경험이든 간접경험이든 구분없이 한 상자에 넣어두는 것 같다. 직접 경험했던 일이 남의 일처럼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간접 경험한 이야기들이 내가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이렇게 가본 적도 없는 곳의 감각이 소환될 때면 신기하기만 하다.


오늘은 한동안 머물렀던 <젤다의 전설> 속 하이랄 왕국으로 문득 돌아가서 하염없이 숲 속을 걷고 싶어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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