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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y 26. 2022

축의금은 도대체 얼마가 적당할까?

모든 것은 맥락 속에 있다

지인 결혼식에 축의금은 얼마가 적당할까? 5만 원이면 될까. 언제적 5만원인가. 요새는 밥값만 해도 5만원이라는데,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10만 원? 거의 기본이 되었지만, 한 달에 결혼식 두 번 가면 20만 원이라는 게 조금 부담스러운 금액일 수 있다. 20만 원? 내 벌이에 비하면 너무 무리가 아닐까.


사람마다 축의금의 편성 기준이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만남의 횟수 단위로 책정한다고 한다. 1년에 한 번 보면 10만 원, 반기 별로 한 번씩 보는 사이라면 15만 원, 분기 별로 한 번 씩 보는 사람은 20만 원을 한다는 것이다. 일견 논리적으로 느껴지는 이 방식은, 그럼에도 허점이 있다. 만남의 횟수가 마음의 깊이와 언제나 들어맞을 리 없다. 마음속 깊이 애정 하면서도 1년에 한 번 보기 어려운 관계도 있고, 어쩌다 보니 자주 만나게 되는 얕은 관계도 있는 법이다. 100만 원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있고, 만 원은 고사하고 참석하는 시간마저 아까운 관계도 있다.


그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친분에 따라 다르게 축의금을 책정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친한 사람의 결혼이라도, 스스로가 실직 혹은 개인회생 같은 경제적 곤란에 처해 있다면 선뜻 큰 금액을 내놓기 어렵게 된다. 반대로 사업이 술술 풀리고 있다거나, 투자 수익이 쏠쏠했다거나, 의도치 않은 공돈이 자꾸만 들어오는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씀씀이가 넉넉해질 것이다.


상대방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어떨까. 아주 친하지는 않더라도 조금 더 보태주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상대방이 엄청나게 부유하다면? 내가 5만 원을 내든 10만 원을 내든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 상대방이 내 박사논문 지도교수 친아들이라면?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아도 인색하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 심하게 싸웠으나 내 결혼식에 축의금을 50만 원 했던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입 씻고 10만 원만 내기에는 민망할 것이다.


그러니까 축의금이라는 것은, 복합적인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 상대와 나의 관계, 관계의 임팩트, 상대방의 지위, 나의 경제력, 상대의 처지, 선물과 현금을 주고받은 히스토리 등 실로 맥락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아마도 세상 모든 정답은 맥락 속에 있다. 아침형 인간 중에도 성공한 사람이 있고, 저녁형 인간 중에도 성공한 사람이 있다. 각자 나름의 방식을 내세워 자기 계발서를 낸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방법 자체에 옳고 그름이 있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효과가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전자의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후자의 방식이 맞을 것이기에.


선배가 후배에게 반말하는 것이 맞나요?, 이런 발언 성희롱 아닌가요?, 예비 신랑이 어쩌고 시어머니가 어쩌고 남자가, 여자가, 연예인 누구의 발언, 누구의 행동… 질문을 가장한 혐오 생산물들이 인터넷 도처에 풍문처럼 떠돌아다닌다. 뉴스 기사로 재생산되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정답은 있나. 속단하기 어렵지만 정답은 아마 맥락 속에 있을 확률이 높다.


나가 죽으라는 말도 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편한 농담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상급자가 우울증에 시달리는 부하직원에게 호통치며 말한다면 간접살인이 될 수도 있다. '탄탄한 가슴'이라는 말은 남녀 모두에게 섹시함의 칭찬이 될 수도, 불쾌한 성희롱이 될 수도 있다. “깎아주세요”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알뜰하고 경제관념 있는 발언으로 보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억척스럽고 교양 없는 발언처럼 느껴질 수 있다.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축의금과 마찬가지로 복합적인 요인에 따라 그 적합성이 결정된다. 다시 한번 실로 맥락적인 판단이 필요해진다.


인터넷에 떠도는 대부분의 질문과 사건들은 대체로 그 모든 맥락들을 도려낸 채, 하나의 문장으로 존재한다. “제 친구가 저보고 ‘나가 죽으라’던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자 친구가 자꾸 밤에 어딜 나가는데요. 이거 바람일까요?” “친구 결혼식에 축의금 10만 원 했는데, 서운해해요. 제가 잘못한 걸까요?” “명절에 시댁을 먼저 가는 게 맞나요?” “명절에 친정을 먼저 가는 게 맞나요?” 맥락이 없는 질문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맥락을 창조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발화하는 주장들이 합의될 리 없다. 대부분 결론은 뭉툭해진다. 불화하는 대화 속에서 누군가는 난독이 되고, 누군가는 또라이가 된다. 많은 논쟁들이 상처만 남긴 채 흐지부지되고 만다.


오래전 콜센터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때, 고객의 사연을 찬찬히 들어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맥락 없는 진상짓’이 ‘합리적인 이의제기’로 변화되는 경험을 한 적이 많다. 적절한 축의금의 액수를 정의할 수 없듯, 충분한 맥락 없이는 어떤 질문도 정확한 대답을 이끌어내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해야 할 노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적당히 들어맞는 평균적인 정답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맥락을 수집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그 태도일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악마든 천사든 모두 맥락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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