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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n 30. 2022

태어나기 이전의 나

내가 이미 겪은 죽음에 대하여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그러니까 10살부터 20살까지 꼬박 10년 동안 교회에 다녔다. ‘예수님을 믿었다’거나 ‘신앙생활을 했다’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딱히 믿음이랄게 없었기 때문이다. 10년 간 거의 빼놓지 않고 교회를 들락거리면서 때로는 찬양인도를 한다든가, 임원을 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성인이 된 후 내 나름의 지각이 갖춰지고 난 다음에는 더이상 교회에 갈 이유가 없어졌다.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오래된 인간관계 때문에 종교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는 내키지 않았다.


가끔씩 교회가 나에게 주던 따뜻함과 안락함을 떠올린다. 모서리가 없는 따뜻한 멜로디의 CCM이라든가, 언제나 친절했던 선생님들. 셀 수 없이 많은 추억을 나누었던 친구들, 형, 누나, 동생들. 지금은 벌써 성인이 되고도 남았을 아이들(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정말 궁금하다.) 마음이 지치고 이른바 영혼이란 게 허약해졌다고 느낄 때는. 그 교회란 곳으로 돌아가서 비이성적인 믿음에 심취해볼까 하는 생각도. 아주아주 가끔. 든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기 때문에 성경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때의 경험들이 지금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데 커다란 밑거름이 된 것도 부인할 수가 없다. (서양 예술의 많은 부분이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탄생한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도 성경과 그들이 말하는 신학적 논리와는 불화했다. 많은 질문들은 보통 해소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왜 지옥에?’ 같은 것들.


중학생 즈음 내가 골몰했던 주제 중 하나는 ‘태어나기 이전의 나’에 대한 것이었다. 죽은 후에 영영 사라져버린다는 것이 너무 끔찍해서, 천국을 맹신하는 교인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이미 지나온 과거라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즈음의 나는 생각했다. 태어나기 전에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죽은 후에도 존재하지 않는게 자연스럽겠다고. 하지만 개신교는 ‘태어나기 전의 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들이 말하는 천국이 그래서 헐겁다고 생각했다.


요즘도 나는 가끔씩 태어나기 이전의 나를 생각한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88올림픽이 있었고, 그걸 경험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 너무도 많다는 사실은 언제나 신기하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이 세계는 너무도 생생하게 존재했는데 거기에 나는 없다. 오래된 기록들이 먼 옛날의 역사를 증명하는데, 거기에도 나는 없다. 지구의 나이가 60억년이고, 우주의 나이가 137억년쯤 된다는데,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없었다.


몽땅 까먹은 기분과는 다르게, 정말로 내가 어디에도 없었구나 싶다. 그런 생각을 자꾸 하면 죽은 후에도 내가 없을 거라는 사실이 이해가 된다. 그때는 죽음에 대해 슬퍼할 자아도 없을 것이라서. 그 영겁의 무의식에 대해서 나는 안타까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불교가 좋다. 언젠가는 불교 경전을 나름대로의 속도로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가 내 마음에 꼭 든다. 지금 내 몸을 이루는 것이 내가 먹은 것들이고, 내가 먹은 것들도, 누군가의 잔해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내가 죽으면 내 몸은 썩고 분해되어 돌고 돌다가. 다른 몸의 일부가 되겠지. 그렇게 내 원자는 우주의 여기 저기서 끊임없이 거듭나겠지. 그게 윤회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상하게, 태어나기 이전의 나를 생각하면 평온해진다. 죽음을 생각할수록 두려워지는 것과 반대로. 태어나기 전의 상태가 내가 이미 겪었던 죽음처럼 느껴진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는 말처럼. 이미 없던 존재였으니. 다시 없는 존재가 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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