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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l 24. 2022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헤어질 결심> 속 서래의 대사에 관하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 죽은 남자는 수영장에 앉은 채로 발견된다. 해준에겐 낯이 익는 얼굴이다. ‘서래’의 새 남편 임호신.


해준은 재고 따질 것도 없이 ‘서래’가 저지른 두 번째 살인임을 직감한다. 해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에게 해준은 성큼성큼 걸어간다. 인사할 겨를도 없이 다그친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그리고 답하는 서래의 말은 영화가 끝난 이후로도 한참동안 맴돌고 또 맴돈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해준의 말은 해석이 간편하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는 말의 의미는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는 말 그대로다. 당신을 좋아해서 전 남편을 죽인 것도 눈 감아 줬는데, 내 관할에 이사까지 와서 또 살인을 저지르다니. 너무 한 것 아니냐고. 당신한테는 내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냐고 해준은 말하는 것이다.


반면 ‘서래’의 말은 해석이 어렵다.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는 서래가 직접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사극을 통해 들었던 대사다. 이전 남편의 사망사건에서 서래는 TV에서 본 대사를 그대로 인용한 적이 있다. 해준이 ‘남편이 뭐라던가요?’ 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독한 것”이라는 대사를 그대로 흉내낸다. 그 말은 죽은 남편 기도수가 했던 말이 아니라, 서래의 거짓말이었다. 서래가 대사를 이용해서 진실을 왜곡하는 방식을 사용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번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도 해준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거짓말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서래의 표정과 목소리를 다시 떠올려보면 아무래도 그 말은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는다. 서래는 남을 속일 목적으로 대사를 읊어댄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신의 무엇이 그렇게 나쁘냐고 물었던 것일까?


단순하게 보면 나를 괴롭게 하는 남편(임호신)을 죽인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이냐고 변명하는 것 같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고, 내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투자 사기꾼 남편을 죽인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이냐고.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서래는 임호신을 죽인 바가 없으므로, 이런 해석은 쉬이 힘을 잃는다.


당신한테 나란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나쁜 사람의 이미지냐고 항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전 남편은 내가 죽인 것이 맞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닌데. 당신을 위해서 살인 현장까지도 청소한 나인데, 당신마저 나를 믿어주지 않으면 나는 어떡하냐고. 당신이 보기에 내가 그렇게도 악랄한 사람이냐고. 억울해하며 되묻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방면에서 이 말은 언뜻 사랑고백 같기도 하다. 이렇게 안 좋은 일로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이렇게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음에 기쁘다고. 그 기뻐하는 마음이 나쁜 것이냐고. 당신은 이렇게 화내고 힘들어하는데, 나는 그런 당신의 괴로움보다 다시 만난 나의 기쁨만 생각하게 되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이냐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보면 서래는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기 위해 그때부터 준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 ‘나쁩니까’는 미래에 자신이 저지를 일을 미리 미안해하는 말 같기도 하다. 당신의 미결 사건으로 남기 위해. 나를 깊은 곳에 빠뜨려서 아무도 찾지 못하게 할 것인데, 내가 벌일 미래의 그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이겠냐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미리 고백하는 말 같기도 하다.


당신을, 내가 사랑해서. 사랑하는 일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말 같기도 하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서래의 말은 아직도 내 머릿속을 맴돈다. 그녀가 울먹이며 뱉은 말이. 도대체 무엇에 대한 말인지 알 수 없어서, 알 것 같아서. 영원한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자 했던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알 수 없어서. 좀처럼 여운을 이겨낼 수 없었다.


엔딩크레딧, 정훈희와 송창식의 '안개'를 들으며 오래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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