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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04. 2022

'좋거나 글감이다'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글 쓰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면 좋은 일이 하나 생긴다. 살면서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글감을 얻었다고 위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좋은 일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좋고,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글로 쓰면 되니 좋다는 이런 생각은, 어느 작가의 말이었는데 지금은 출처를 잊어버렸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나도 나를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안 좋은 일이 생길 때 곧잘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특히 여행지에서는 더 그렇다.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버스를 놓친다든가, 하필 내가 간 날이 박물관 휴관일이어도 그다지 괴롭지가 않다. ‘예측불허의 우연들이 나의 여행을 다채롭게 만들어주는구나.’ 하고 만다. 여행을 갔는데 하필이면 조금 아파서 불편하게 지내더라도 굉장한 글감이 생겼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모르는 사람과 시비가 붙거나, 조금 불친절한 점원들을 만나도 그렇다.


생각해보면 내가 혼자든 같이든 여행했을 때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사소한 일로 크게 싸웠다든가, 무언가 잃어버렸거나 개고생을 했거나 계획이 틀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무하고도 싸우지 않고, 아무 사고도 발생하지 않으며, 너무나 편안하게, 계획대로 진행된 여행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겪고 싶지도 않다.


"작가로 살면 '좋거나 글감'이야. 나쁜 건 없어.” 그렇게 오만하던 나는 몇 년 전 여행에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창 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 효도 비슷한 게 좀 하고 싶었다. 과외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매달 저축할 만한 여유가 있어서 어머니와 여행을 좀 다녀오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요?” 내가 묻자 엄마는 “얼마 전에 테레비에서 홍콩을 봤는데 한 번 가보고 싶더라.”고 하셨다.


유럽 여행까진 아니어도 해외여행이고 크게 돈이 많이 드는 곳도 아니어서 몇 달 동안 모은 돈으로 여행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나는 조금 의기양양했다. 오로지 내 돈으로, 내가 계획하고, 내가 예약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떠나는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는 아무것도 준비할 것이 없다고 호언 장담했다. 그렇게 여행 날짜가 다가왔다.


전날 짐을 싸는데, 여권이 보이지 않았다. 여권을 넣어두던 작은 상자가 있었는데, 거기에 없었다. ‘아, 그럼 안방 서랍안에 있나 보다’했다. 시간이 벌써 새벽이었고, 당연히 여권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일단 자기로 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다시 찾아보니 아무데도 없었다.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여행을 못 갈 위기에 처했다.


식은땀이 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머니는 휴가도 내고 주변에 벌써 자랑을 다 하신 모양이었는데, 예약한 호텔도, 액티비티도 있었는데, 모든게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났다. 막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거의 울상으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고, 여권을 분실한 사람들을 위해 공항에서 단수여권을 발급해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정말 그렇게 되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옵션이 없었기에 일단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정말 분주했다. 어머니는 거의 체념한 채로 앉아계셨고, 나는 열심히 뛰어다녔다. 새로 사진을 찍고, 우여곡절 끝에 담당 창구에서 일회용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아주 여유롭게 출발했지만, 발급 절차가 길었기 때문에 비행기에는 정말 아슬아슬하게 탑승할 수 있었다. 어찌됐건 여행은 계획대로 갈 수 있게 됐고, 즐거웠고, 안전하게 돌아오기까지 했지만, 이렇게 글감도 생겼지만 달가운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만약 그때 여행을 가지 못했다면, 나는 정말 우울했을 것이다. 글감이 생겼다는 위안도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오래오래 상처로 남아서 내 자존감을 깎아 먹는 트라우마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것, 단수여권을 발급받아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큰 다행으로 느껴진다.


이제는 ‘작가로 살면 좋거나 글감이다.’ 같은 말은 쉽게 내뱉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족을 괜히 붙이게 된다. 신기하다. 살면서 오만해지는 순간마다, 호언장담할 때마다 꼭 미끄러진다. 겸손이 미덕이라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겸손하게 살지 않으면 영원히 응징당할 것 같다. 모든 나쁜 일이 글감이 되는 것이 아니며, 아름답게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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