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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11. 2022

아웃백이 서글프다

어느 크리스마스

2013년의 크리스마스는 잊을 수가 없다. 연애경험이 많지 않던 22살의 나는 데이트 코스를 성실하게 짜는 남자친구였다. 롯데월드에서 알바하며 만났던 당시의 여자친구는 내 이상형에 부합하게 키도 크고 다리도 길고 날씬했고, 이목구비도 뚜렷했다. 여자친구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때는 계획을 단단히 세워서 여자친구를 기쁘게 만들어주는 것이 자부심이자 행복이었다.


사귄 지 얼마 안되어 맞은 크리스마스는 한 달 전부터 차질없이 준비했다. 명동의 아웃백을 예약하고, <어바웃 타임> 개봉에 맞춰 좋은 자리를 예매하려고 컴퓨터로 예매 연습도 하고(결국 중앙의 좋은 자리를 잡았다.) 호텔도 미리 잡았고, 편지도 썼고, 선물도 샀다. 여자친구에게는 다 준비되어 있으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면서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글로 쓰라고 그랬는지 문제가 생겼다.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확인 차 아웃백에 전화를 걸었더니 젊은 남자 직원이 너무나 천진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예약이요? 저희는 크리스마스에는 예약을 받지 않는데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직원 말에 의하면 아웃백 명동점은 크리스마스에 예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내 이름으로 예약된 바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분명 한 달 전에 예약을 해서 오늘은 확인 차 전화를 건 것이라고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대답만이 반복되었다.


이제 와서 크리스마스에 그럴듯한 식당을 예약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녁 식사시간에 맞춰 영화도 예매하고 모든 동선을 다 짜놓았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 순간 ‘언제나 친절하고 매너있게 점원들을 대한다’는 나의 원칙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예약을 받아놓고 오리발을 내밀다니. 분노만 치밀어 올랐다.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전화를 세 번인가 네 번인가 바꾸면서, 여러 직급의 여러 사람과 통화를 했다는 것만은 기억난다. 나는 차분히 설명하기도 했고, 화를 내기도 했다. 긴 통화 끝에 결국 크리스마스에 내 자리를 비워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크리스마스 이브 당일, 데이트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한껏 꾸민 신촌 거리를 나란히 걷다가, 카페에 가서 한참이나 떠들고, 명동으로 이동해서 <어바웃 타임>까지 좋은 자리에서 감상했다. 이제 아웃백으로 갈 차례였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아웃백 명동점의 줄. 카운터 앞 대기석부터 바깥의 도로까지 사람들은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명동 거리에는 사람들이 걷기 힘들 정도로 빼곡했고. 추운 날씨에 대기줄은 인파와 섞여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들을 헤치며 여자친구의 손을 끌고 아웃백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어제 말씀을 드렸는데, 예약을 해주셨거든요. 이름은 서댐입니다.”

“아 네. 들어오세요.”

직원은 별다른 확인 절차도 없이,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응대를 해주었다.


서버는 우리를 자리로 바로 안내해주었다. 안쪽의 넓고 편안한 테이블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예약된 단 하나의 테이블에 앉는 기분이, 그 당시 나에게는 무슨 대단한 특권처럼 느껴졌다. 저녁 식사까지 완벽하게, 크리스마스는 다행히 계획한대로 흘러갔고 내가 그린 그대로의 낭만적인 데이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연애와 크리스마스가 가끔 생각난다. 그 아련한 추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화되기만 한다. 그 날 이후로 아웃백을 지날 때마다, 아웃백을 갈 때마다, 2013년의 크리스마스가 빠짐없이 떠오른다. 어설펐던 나를 좋아해준 그 친구에게 말할 수 없이 고맙고, 순수했던 당시의 나도 그리워진다. 한 번 지나친 그 아름다운 순간들로 결코 돌아갈 수가 없다는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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