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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Oct 03. 2022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사람은 점진적으로 현명해지는가.

어릴 때는 사람이 점진적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15살 보다는 20살이, 20살 보다는 40살이 성숙할 것이라는 추론을 아주 당연하게 했다. 그때는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성장기에는 누구나 모든 면에서 점진적인 성장을 이루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의 나는 대학 입시에 있어서 ‘재수’라는 제도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남들보다 1년 더 하면, 당연히 1년치 만큼 더 잘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삼수가 재수보다, 재수가 현역 수험생보다 늘 높은 성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즈음부터인지. 사람이 꾸준히 좋은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나의 믿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고등학생 때까지. 나는 매년 조금씩은 더 나은 사람이었다. 모르던 것을 하나씩 배우고.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면서 거칠거칠한 표면의 무엇인가를 계속 깎아내며 매끈해졌다. 미술학원의 아그리파처럼 여전히 둔탁하게 각진 모습이었지만, 계속 깎고 문지르다보면 피렌체의 다비드 상처럼 매끈하고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런데 스무 살을 통과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는 등. 어떤 시기를 겪을 때마다. 깎여나간 미숙함 만큼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물질이 덕지덕지 덧발라지는 듯도 했다. 어느 면은 거칠어지고. 어느 면은 심하게 미끄덩거리는가 하면 의도치 않은 물감으로 색칠이 되기도 했다.


알고보니 사람은 미숙함을 계속 깎아내면서 점진적으로 멋지게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추악해지고, 약아지고, 비겁해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오랜 시간, 자신을 계속 연마하면서 끝내 다비드 상이 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흔히 쓰는 말로 모두가 ‘와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이 든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주 느끼는 감정 중에 하나는, 그들이 현명하기 보다는 삶에 지나치게 최적화 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말랑말랑한 감정들. 이를테면 부끄러움이라든지, 배려라든지, 양보같은 것들이 별로 의미없음을 잘 알게 된 것 같았다. ‘내가 왜 양보해.’ ‘잠깐 부끄러우면 그만이야.’ ‘손해 볼 필요 없어.’ 하는 식의 방식. 내 얼굴이 대신 화끈거릴 정도로 많은 어른들은 낯이 두꺼웠다.


또 어떤 어른들은 자기 권한을 잘 이용하는 법, 사람을 착취하고 몇 마디 말로 달래는 법에도 징그럽게 능숙했다. 약점을 쥐고 흔들고, 지위든 나이든 돈이든 자신이 우월한 무엇으로 어김없이 협박을 하고, 세상을 겪어보라고 훈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게 너무 싫으면서도 또 무섭다. 그들이 내 미래일 수 있기에. 나만 해도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매끈하다 못해 미끌거릴 때가 있다. 이러다가 무슨 뱀장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심장이 덜컥한다. 가끔 말못하게 이기적이고 약았다는 생각이 스스로 들 때마다 3할 타자였다가 방출 선수가 되는 기분으로 멘탈 약한 야구선수처럼 흔들린다.


여러 행운이 겹쳐서 치명적인 사고 없이 늙어 죽을 수 있다면. 끝내 현명해지고 싶다. 등락을 반복하면서도 멀찍이서 보면 희미하게 우상향하는 주식처럼.


누군가에게 반면교사가 되는 그런 어른으로 늙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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