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Nov 21. 2022

<폴: 600미터>가 명작이 될 수 없는 이유

<127시간>과 <폴: 600미터>는 어떻게 다른가

<폴: 600미터>라는 제목과 포스터를 보면 누구라도 이 영화의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주인공이 600미터 높이로 올라가겠구나, 쉽게 내려오지 못하겠구나, 고소공포증을 유발하겠구나, 결국 내려오기는 하겠구나. 아마도 명작 일리는 없겠구나. 아주 빠른 시간 안에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럼에도 여자 친구의 손을 잡고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내 예상은 얼마나 들어맞았나. 모두 들어맞았다. <폴: 600미터>는 예상 그대로의 영화다. 그렇지만 예상 그대로라서 실망스러운 작품이 아니라, 예상 그대로이기 때문이 만족스러운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저 영화의 주인공이 600미터 높이의 구조물로 올라가지 않았다면, 거기서 우여곡절을 겪지 않았다면, 끝내 주인공이 내려오지 못했다면, 이 영화가 심오하고 예술적이었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마치 어트랙션을 타러 가는 기분으로 나는 극장을 찾았고 영화는 내 기대를 만족시켜 주었다. 기분 좋게 보았지만 딱 그 이상은 없는 오락영화로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뻔한 영화에 대해서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127시간>과 아주 비슷하면서도 결정적으로 차이를 만들어내는 지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을 떠올리면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떤 점이 <폴>과 <127시간>을 명작과 범작으로 나누었을까.


(<127시간>을 명작이라 생각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저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 <127시간>을 명작이라 전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폴: 600미터>와 <127시간>의 가장 표면적인 차이는, 실화 기반이라는 점일 것이다. 알다시피 <127시간>은 산악인 아론 랠스턴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블루 존 캐니언을 홀로 등반하다가 절벽에 갇힌 그는 실제로 자신의 팔을 자르고 탈출했다. 어찌 보면 무리수에 가까운 이 영화의 스토리는 실존하는 인물의 일화를 다뤘다는 점에서 강력한 사실감을 획득한다. 누군가가 실제 겪었을 그 고통을 사실감 있게 재현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절실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반면 <폴...>은 헐리우드 작법에 따라 충실하게 구성된 오락영화다. 작정하고 롤러코스터를 태우겠다고 하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조금 팔짱을 끼고 볼 수밖에 없다. 영화도 나름 애를 쓰지만, 결국 MSG를 잔뜩 들이부은 배달음식. 그 이상을 전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실화라는 사실 때문에 <127시간>은 명작이 되고 <폴>은 범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경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느냐, 그저 소비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 같다. 전자에서 아론 랠스턴은 자신의 오만을 뛰어넘어 성장하지만, 후자에서의 베키는 그 어떤 성장도 이루지 못한다.

<127시간>에서 아론 랠스턴은 자신만만한 남자다. 스스로를 과신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적을 주변에 알리지도 않는다. 블루 존 캐니언 구석구석을 파악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시종일관 조심하지 않는. 거침없는 액션을 선보인다. 그러다 그는 추락했고, 팔이 끼었고, 망망대해와 같은 절벽에 갇히고 만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그는 어떻게 하는가. 먼저 자신이 오만했음을 인정한다. 자신의 과오를 떠올리며 반성하기 시작한다. 그다음으로는 결단한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자신의 팔을 직접 자르기 시작한다. 피를 철철 흘리며 그곳을 빠져나간다. 구조된 뒤에는 어떻게 하는가. 이제 그는 자신의 행적을 주변에 꼬박꼬박 알린다.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언제든 실수할 수 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으로 지켜봄으로써 우리는 어떤 묵직한 감동을 얻게 된다. 나는 저런 오만함을 보인 적이 없었는지 반성하기도 하고, 손에 쥔 것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엄청난 역경을 벗어나려 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기도 하고, 변화된 그를 보며 자신을 다그치기도 하는 것이다. 아론 랠스턴과 그야말로 하나가 되는 경험을 통해 그의 성장과 더불어 나도 조금은 성장하게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폴: 600미터>에서 베키는 성장이란 걸 하지 않는다. 남편을 애도하고 잊어버리겠다는 숭고한 목표보다, 인스타 인증샷을 남기는 것이 훨씬 중요해 보이고, 그 어떤 숙고도 하지 않은 채 감정에 휘둘린다. 애초에 인생은 한번뿐이라고 대단한 리스크를 감내하는 척을 하면서, 결국 일이 터지자 징징대는 것밖에 할 줄 모른다. 온갖 어려운 일들은 친구에게 떠넘기고, 친구가 죽자 그제서야 움직인다. 베키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을 위해 희생한 적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고통만 중요하고, 자신만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살아남은 후에도 자기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데 그친다.


따지고 보면 탈출을 위해 직접 해낸 바도 없다. 정말 위험한 일은 친구인 헌터가 했고, 드론을 충전한 일은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다. 친구와 함께 있을 때는 눈물만 흘리다가, 정말 살고 싶어 지니까 독수리도 생으로 씹어먹는다. 그리고나서 하는 일은? 죽은 친구의 창자에 핸드폰을 쑤셔 넣는 일이다. 친구 눈이라도 감겨줄 것을. 그냥 떠밀어 버린다. 연락을 받아 구조대를 부른 것은 아버지고, 탈출하고 나서는 친구의 시체를 무슨 오랫동안 방치된 쓰레기봉투 보듯 한다.


똑같이 죽을 위기를 겪고, 탈출하면서도 <127시간>과 <폴: 600미터>는 이렇게 다르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지. 역경을 통해 성장하는지에 달려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폴>이 엉망진창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락 영화로서 나름 탄탄하고, 기대한 만큼 재미를 정직하게 돌려주는 작품이다. 그냥 비슷한 구조와 전개를 보이면서도 이렇게나 다른 끝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덧붙이자면, 나는 600미터 구조물 꼭대기에 갇힌 상황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살아남으려고 악착같이 노력하기보다는 그저 죽음을 받아들일 것 같다.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들이 보인 생명에 대한 끈질긴 집착이 나로서는 별로 공감되지 않았다. 속으로 여러 번 중얼댈 뿐이었다.


'인생의 마지막을 줄 없는 번지점프로 장식하는 것도 선택할 만한 옵션인 것 같은데.'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는 사라지지 않을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