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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n 13. 2017

태양에 관하여

- 새삼스럽게

얼마전 정동진을 다녀왔다.

밤 기차로 가면 아침 네시 반쯤 도착할 수 있다.

밤을 꼬박 새우며 달려가는 길. 기차는 선로와 맞지 않은 듯이 덜컹거렸다.

온통 까만 풍경이 이어졌고, 그 모습은 마치 배경을 바깥으로 치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바다를 봐야해. 기차는 이런 말을 읊조리면서 검은 장면들을 옆으로 마구 치워냈다.

다섯 시간 쯤 걸리는 길이었으므로 짧지는 않았다. 나는 그 시간동안 아끼는 시집을 꺼내 읽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빌려준 책을 뒤늦게 꺼내어보면서,

남겨져있을 그 무색무취의 지문을 느낀다는 시인의 말이 새삼스럽게 짠했다.


*


바다에 가까워지자 수평선은 붉은 기를 숨기지 않았다.

기차가 정동진에 도착했을 때. 아직 해가 뜨려면 삼십분이나 남았지만 세상은 온통 밝았다.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전에 이미 세상이 밝아있다는 건 왠지 모르게 김이 빠졌다.


그런데 웬걸. 수평선이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한껏 붉어졌다.

그곳에서 태양은 빠끔히 머리를 들어올리더니

무서운 속도로 솟아올랐다.

물에서 솟아오르는 듯. 혹은 알수 없는 아득한 저편에서 떠오르는 듯. 오묘했다.


매일 아침 이런 장엄한 일이 벌어진다니

태양의 이 떠오름을 매일 지켜볼 수 있다면

하루를 결코 헛되이 소비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해의 뜨고 짐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매일 공산품을 쓰고 버리듯 인생이 낭비되는 것은 아닌가.


파도는 내게로 뻗는 손처럼 절박하게 다가왔다가 안타깝게 부서졌다.

바닷바람이 몹시 불었고 머리는 헝클어졌다.

나는 발이 푹푹 꺼지는 축축한 해변을 아슬하게 걷다가

뒤로도 걸었다.


그는 그 사막에서 너무도 외로워/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자기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래전 아버지가 소설책 귀퉁이에 적어주신 짧은 시를 떠올리면서.


*


하늘에 다 떠버린 태양은

지루한 노래의 2절 같았다.


내가 알던 그의 모습. 더이상 신비롭지 않았다.

허름하게 밝혀있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칼국수 한그릇을 먹고 마냥 걸었다.


더이상 장엄하지도, 신비롭지도 않은 태양은

하늘 위에서 그 속도를 알지 못하게 교묘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


분주한 하루였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조성된 바다부챗길을 걸었고

썬크루즈 호텔(언덕에 세워진 유람선 모양의 호텔) 스카이 라운지에서 맥주 한병을 마셨다.

내려다보며 그림을 하나 그리고.

영화 4월 이야기를 봤다. 잔잔했다.


미술관도 들렀다. 회도 먹었고. 하염없이 걸어다녔다.

고속도로 귀퉁이의 자전거 도로에서 춤을 추며 걸었다.

이어폰의 영향으로 세상엔 음악이 가득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음악을 듣는 일이

처음 태어나 본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느새 하늘도 가라앉을 준비를 하는지

그 땡땡한 햇볕도 한차례 기가 죽고

다시 기차에서의 무료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돌아오는 길.

나는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쓰고 그림을 하나 그렸다.

-정동진


빨간색 하늘이었노라 말하면

영 이상한 눈들로 보겠지만

정동진에 있었다고 하면

끄덕이겠지


하루도 빠짐없이 만난 친구는

인생을 통째로 털어도

너 뿐일텐데

새삼스러운게 새삼스러워


유독 피어나는 모습에 울컥하는 건

아마 그 순간의 붉은 색 때문일거야


인정없는 자세로 서 있어도

가만가만 밀려오는 파도는

네가 멀리서 보내온 악수일지도 몰라


나는 발끝을 살짝 적시는 것으로 화답하고

중천으로 떠가는 너에게 등을 지고 걷는다.

자꾸만 덜컹거리는 무궁화호의 의자에서


새삼스러웠어 태양아.

약속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너를 조금 더 생각할게.


자꾸만 바보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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