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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pr 28. 2023

좋은 사람

좋은 인연 속의 나와 나쁜 인연 속의 나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라고, 어린 날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나 친절하던 교회 선생님, (짝사랑한) 짝꿍, 단짝 친구, 엄마는 '좋은 사람'이었고 만화 속 악당, 동네 건달, 술주정뱅이, 서울역 노숙자, 깡패, 일본인은 '나쁜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헷갈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당장 알 수 없을 뿐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임에 틀림없었다.


좋은 사람은 좀처럼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 친절하고 착하고 따뜻한 사람들... 그러다 가끔씩 그의 이기적이고 거친 면을 발견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단지 나의 판단착오일 뿐이었다. 알고 보니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서둘러 '나쁜 사람'으로 분류했다. 그러고 나면 결국 좋은 사람은 언제나 좋은 사람으로만 남았다. 나의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그리고 아직 알 수 없는 사람만 있었다. 그런 시간은 꽤 오래 계속되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에게 좋은 사람'과 '나에게 나쁜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군 시절 어느 주말 오후에 뒹굴거리며 읽던 법륜 스님의 책에도 그런 말이 있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이 있다.' 몸소 경험한 이후 그 말이 가슴으로 와닿았다.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몸 담고 있는 어디든 풍문이 가득했다. '누가 어떻다더라, 어떻게 했다더라...' 세상에는 참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는 모양이었다. 별생각 없이 평판이 안 좋은 누군가를 '나쁜 사람'으로 분류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유쾌하고 착한 사람인 경우도 많고, 그러다 단짝처럼 친해진 적도 있었다. 법륜 스님의 말마따나 소문의 진위나 그 사람의 됨됨이는 각자의 인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오롯이 주관과 해석의 세계였다.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고, 무수한 영화를 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입체적인 모습과 사연을 접해보니, 세상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딱 떨어지는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모텔에서 손님을 살해했지만 잡혀가기 직전까지 후임 근무자를 위해 인수인계에 공을 들였다는 장대호 같은 범죄자, 아무렇게나 학생들을 패면서도 지극히 가정적이었던 고등학교 선생님도 좋고 나쁨이 중첩되어 있는 존재였다.


그 사실을 모두 이해하면서도, 내가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은 종종 견디기 어렵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욕심은 좀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좋은 사람의 덕목을 완벽히 이해하고 모두에게 실천하고 싶다는 바람이 늘 나를 따라다닌다. 그런 숭고한 경지에 나처럼 이기적이고 속 좁은 인간이 쉽게 다다를 리 없다. 결국 스스로를 좀먹거나, 어설프게 타협하거나, 아예 놓아버림으로써 누군가에게 완벽히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살아온 과정이 늘 그랬다. 쌓으면 무너지고 쌓으면 무너지는 모래성 같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이 있다는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좋은 나와 나쁜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좋은 인연 속의 나와, 나쁜 인연 속의 내가 있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나를 파괴하지도 않고 남을 상처 주지도 않으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에게는 그게 참 어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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