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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pr 19. 2023

누가 라디오를 아름답다 했는가

<메이비의 볼륨을 높여요>와 우리 형

라디오에 대한 추억이 많다. 중학교 때 수련회 갔다가 5000원짜리 미니 라디오를 산 적이 있었는데 한동안 나의 보물이었다. 버튼이 하나뿐이었는데, 누르면 채널이 넘어가는 형식이었다. 현재 주파수도 알 수 없었고 뒤로 가기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채널이 나올 때까지 계속 버튼을 눌러야 했다. 실수로 한번 더 눌러 채널이 넘어가기라도 하면, 한 바퀴를 다시 돌아야 했다.


어릴 때부터 잠에 쉽게 들지 못하는 편이어서, 잘 시간이 되면 이어폰을 끼고 라디오를 들으며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에 잠겨있을 때가 많았다. 이소라의 음악도시를 들으며 보낸 여러 밤들은 아직도 낭만적인 감정으로 남아있다.


그 싸구려 미니 라디오를 참 아꼈었는데 반년 남짓 사용하자 망가져버렸다. 따로 라디오를 구입할 생각까지는 들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흘러갔다. 라디오를 다시 듣게 된 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그즈음, 형이 라디오에 빠졌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면서 라디오를 듣다 보니 흥미를 붙이게 된 것이다. 나도 형을 따라 여러 라디오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형은 책도 안 읽고 글도 못쓰는 편인데, 사연을 어떻게 쓰는지 이런저런 경품을 막 받아왔다.(나는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한 달에 여섯 개의 경품을 받은 적도 있었다. 작은 백팩, 식사권, 찜질방 이용권, 소품, 학용품 등... 배송된 경품을 언박싱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당시 형이 가장 좋아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은 <메이비의 볼륨을 높여요>였다. 요즘 말로 거의 과몰입 상태였다. 귀엽고 털털한 메이비 누나의 매력에 형은 완전히 빠져버렸고 모든 생방을 청취하는 것은 물론 시청자 이벤트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열혈 팬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메이비 볼륨을 높여요>에서 동대장을 선발한다는 공고가 발표되었다. '동대장'이라 함은, 자기가 살고 있는 '동'의 대장이 되어, 그 동네에 프로그램을 열심히 알리는 일종의 '행동대장' 역할을 말하는 것이었다. 혜택이 전혀 없는 '명예직'이었으나 꽤나 높은 경쟁률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히 우리 형도 우리가 살고 있던 동네의 동대장에 지원했다.


선발 방식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지만 아무튼 라디오를 열심히 듣고, 나름의 증빙을 해야 했던 것 같다. 형은 자랑스럽게도 '동대장'에 선발되었다. 우리 동네에 형만큼 <메이비의 볼륨을 높여요>를 열심히 들었던 사람이 없었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친구들을 모두 포섭하고, 본방을 사수하고, 문자를 열심히 보내는 등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형은 무슨 지역구 국회의원처럼 '동대장'의 본분에 충실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때까지 이 귀여운 추억이 비극으로 남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어느 일요일 오후, 라디오 방송사 제작진으로부터 형은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메이비의 볼륨을 높여요>였을까? 아니었다. 전화를 걸어온 쪽은 'MBC' <강인, 조정린의 친한 친구>였다.


"안녕하세요 김우주 씨 되시나요?"

"네 맞는데요."

"안녕하세요, 저희는 MBC FM4U <강인, 조정린의 친한 친구>입니다."

"근데요?"

"네- 다름이 아니라, 라디오를 열심히 들어주시는 것 같아서요. 이번에 저희 MC가 강인, 조정린 씨로 바뀌었는데요. 홍보 차 선물을 좀 보내드리려고 해요."

"아, 감사하지만 저는 메이비 누나 꺼 들어서 괜찮아요..."

"아 그러세요?..."

"근데, 선물이 뭔데요?"

"피자 30판, 햄버거 50개 중에 선택하실 수 있어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세상에는 형처럼 열렬한 라디오 팬이 많았고, 물밑에서는 영입 경쟁이 벌어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형은 라디오를 열심히 들으니 별일이 다 생기는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친한 친구>를 듣는지 안 듣는지 불법사찰을 할 수도 없을 테니, 선물을 받아도 입을 씻으면 그뿐이었다.


"음... 피자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는 그렇게 끝이 났고, 형은 이 사실을 나에게도 알려주었다. 정말 대박이라며, 나와 형은 잔뜩 들떴다. 형은 피자를 학교 쪽으로 받아서 친구들과 나눠 먹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내가 생각해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았다.


월요일 오후 야자 시간이 되자, 형은 여느 때처럼 친구들을 독려해 <메이비의 볼륨을 높여요>를 듣기 시작했다. 메이비 누나의 목소리는 역시 귀여웠고, 재치가 넘쳤다. 지루한 야자시간은 오로지 메이비 누나 덕에 견딜만한 것이었다.


"네 여러분~ 오늘은 저희가 조금 특별한 코너를 준비해 봤는데요! 그 이름은 바로... '동대장 충성심 테스트'입니다! 얼마 전 선발되신 동대장 분들이 열심히 활동을 하고 계시죠? 이 분들이 다른 마음은 먹지 않는지! 얼마나 <메이비의 볼륨을 높여요>를 사랑하시는지! 알아봤습니다. 그럼 한 번... 들어볼까요?!"


그리고는 곧 대전의 어느 지역에 산다는 첫 번째 동대장과의 통화 녹음본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강인, 조정린의 친한 친구입니다-! (어쩌구 저쩌구...) 피자와 햄버거 중에 어떤 걸로 받으시겠어요?"

"저, 죄송하지만... 저는 <메이비의 볼륨을 높여요>를 듣기 때문에 그런 거 필.요.없.습.니.다."


강단 있는 첫 번째 동대장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팡파레 효과음과 함께 웅장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메이비 누나는 호탕한 목소리로 웃으며, "000 씨 정말 감사합니다!" 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두 번째, 세 번째 동대장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메이비의 사람이며, 다른 라디오를 듣지 않는다'고 무슨 사육신처럼 딱 잘라 말했다. 분위기는 훈훈했고, 얼굴이 하얘진 건 전국에서 우리 형뿐이었다.


"네 마지막으로 현저동 동대장 김우주 씨 통화를 한 번 들어볼게요!"


정말 놀랍게도... 전국 방송에 형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강인 조정린의 친한 친구> 관계자라던 사람은 다름 아닌 <메이비의 볼륨을 높여요> 작가였고, 방송국 놈들을 의심하기에 형은 아직 너무도 어렸다. 형도, 나도, 형의 친구들도 모두 <메이비...>를 듣고 있었고, 녹음된 통화 내용은 (야속하게도) 가감 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피자 30판, 햄버거 50개 중에 선택하실 수 있어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음..."


피자요!



형의 천진난만한 "피자요!"는 볼륨을 키우고 리버브까지 잔뜩 걸어놓은 바람에, 피자요.. 피자요.. 피자요.. 피자요... 하면서 여러 번 울렸다. 곧 '쿠구궁!' 하는 천둥 효과음과 '띠로리-'하는 절망의 효과음이 차례로 퍼졌다.


"김우주 씨! 피자가 그렇게 좋으셨나요!!!"


메이비 누나가 장난스럽게 소리쳤고, 같은 시간 형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절규뿐이었다. 친일 행각이 뒤늦게 탄로 난 애국 시인의 마음이 그러했을까. 지금도 나는 차마 그 부끄러움을 가늠할 수가 없다.


이상형이라던 메이비 누나가 형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퇴출되는 순간이었다. 형의 열렬했던 라디오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 사연은 당사자의 허락 없이 작성되었으며, 형의 이름은 본명으로 처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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