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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Feb 06. 2023

모든 것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시를 쓰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2015년. 국어를 전공했지만 글을 쓰지 않고, 시집 한 권 제대로 읽어본 바 없이 대학교 3학년이 되었다. 내가 대학교 3학년이라니. 뭘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어느새 선배였고, 대학교는 언제나 1,2학년을 위한 공간이었다. 익숙해진 모든 것들로부터 조금 치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생에 노인이 있듯이 고등학교에는 고3이 있는 법이었고, 대학교에는 3,4학년이 있는 법이었다. 내년이면 내가 졸업반이 되는구나. 그렇게 취업전선에 뛰어들겠구나. 나는 무슨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복잡했다. 몹시 두렵고 조급했다. 좀 알만 하면 떠나야 하는 게 대학생활 같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교 3학년의 봄은 그렇게 왔다.


시창작 수업을 신청했다. 1학년 때 '현대시론'이라는 4학년 수업을 신청해서 듣긴 했지만 점수가 형편 없었다. "이건 시가 아니야!" 노교수님은 과제로 해 간 시를 눈 앞에서 찢어버리셨다. 가뜩이나 낯설던 시와 더 멀어진 계기가 되었다. 언제나 시는 도통 모르겠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시창작특강'을 수강신청한 건 그냥 들을 수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 수업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온화한 교수님의 말투와 존칭으로 남아있다. 첫 수업부터 바로 과제가 있었다. 주제는 '인간관계', "두 줄로 시를 써 오세요." 그게 다였지만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잘 쓰고 싶다.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번갈아 머릿속을 때렸다. 교실을 나오면서부터 머리가 쉬지않고 돌아갔다. 그날부터 나의 삶은 온통 시로 가득 찼다.


타인

가격표가 없는 자판기 앞에서
나는 얼마를 내야할 지 알 수 없다


이런 시를 써 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항상 가격표가 없는 자판기 앞에 서 있는 기분이 아닌가. 무엇을 얼마만큼 줘야 하는 지 알 수 없는 그 막막함. 아득함이 떠올랐다. 두 줄을 쓰기 위해서 일주일을 꼬박 궁리했다. 더 이상은 다듬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제출하고 나서는 이상하게 기분이 후련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은 기분으로 충만했다.


다음 수업 시간이 찾아왔다. 교수님의 수업은 제출한 모든 시를 순서대로 읽으면서 리뷰해주는 방식이었는데, 내 차례가 올 때까지 심장이 몹시 뛰었다. 교수님은 내 시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다. 일부러 뒤쪽으로 배치해서 수업시간이 다 가도록 길고 자세히 분석해주셨다. 좋은 시라고 칭찬도 해주셨다. (후배들에게 듣기로 이 시는 교수님의 강의안에 포함되어 최근까지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내 삶의 큰 자랑이다.)


그 다음 주에는 네 줄 시를, 그 다음 주 부터는 자유시를 써내야 했고, 시만 쓰다 한 학기가 다 가버렸다. 시창작 수업을 들었던 그 3학년 1학기 내내, 하루 24시간 시만 생각했다. 길을 걷다가도 시를 생각했고, 잠을 자다가도 시를 생각했다. 수없이 시를 읽고 연구했다. 세상을 시로 보고, 시를 통해 세상을 보니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눈이 생긴 기분이었다. 시를 진지하게 써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새로운 눈 하나를 얻는 일이라는 것을.


시는 발상이고, 비유다. 시의 세계에서는 문법의 파괴조차도 허용된다. 시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거기에는 무제한의 상상과 자유가 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것,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 시의 태도이다.


나는 일상에서도 항상 비유법을 사용한다. 일을 할 때에도, 잡담을 할 때에도 숨쉬듯 비유한다. 누군가는 좀 피곤하게 느낄 수도 있는데 어쩔 수 없는 습관이 되었다. 나에게 무슨 단어를 주든 나는 그와 비슷한 속성의 완전히 새로운 사물들을 떠올릴 수 있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비유의 세계가 내 정신에 이식되어 있으므로.


'모든 것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나의 이 시창작론은 삶의 태도에도 영향을 준다. 시의 세계에서는 폐타이어도 사랑의 비유가 될 수 있고, 깨진 기왓장도 우정의 비유가 될 수 있다. 오래된 영수증이 미련의 비유가 될 수 있고, 섬유유연제가 죽음의 비유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뒤섞일 수도 있다. 폐타이어를 오래된 영수증으로 비유할 수도 있고, 깨진 기왓장을 섬유유연제와 닮은 것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은 때때로 나도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용기로 변화되기도 한다.


삶의 태도는 자주 흔들린다. 나답게 내 방식대로 사는 것이 정답인지. 세상의 통념과 연륜이 주는 지혜를 따라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전자를 따르자니 불안하고, 후자를 따르자니 삶이 뻔해진다.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럴 때는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한다. 극한의 언어 세공을 보고 있으면, 마치 제임스 웹 망원경으로 찍은 우주 사진을 보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우주적 스케일로 세상과 나를 관망해볼 기회를 얻는다.


현실을 살아가더라도 시를 놓지 못하는 이유가 그렇다. 레고인형이 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핸드메이드가 되고 싶어서 그렇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직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언제나 시는 답을 알려주지 않고 답을 찾게 해주었으니, 이렇게 시를 놓지 않고 살다보면 언젠가는 뚜렷해지지지 않을까. 다만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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