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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an 10. 2023

우리 형은 기타를 안 치는 실용음악과

형 이야기 (4)

나보다 두 살 많은 친형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실용음악과로 진학하겠다고 선언했다. 무슨 실용음악과가 여름성경학교도 아니고. 날고 긴다는 실용음악 입시전쟁에 뛰어들기에는 너무 늦은 선택이 아닌가 싶었다


형은 나름대로 열심히 했겠지만... 현역으로 치른 첫 해 실기에서 무력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형은 굴하지 않고 과감히 재수를 단행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했다. 그만하면 되었다는 듯 아르바이트로 잠깐 용돈을 벌던 형은 햇살이 쨍쨍한 어느 여름날 입대했다. 끝맺지 못한 소설처럼 어중간한 결말이었다.


형이 떠난 집에 덩그러니 남은 야마하 기타를 볼 때마다 나는 괜히 울적해졌다. 가끔씩 앰프에 꽂지도 않고 그 일렉기타를 쳐보곤 했다. 울림통 없이 당그랑거리는, 맥없는 일렉기타소리처럼 힘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형은 기타를 잘 치는 편은 아니었다. 형도 인정할 것이다. 어쩌면 내공있는 일반인 연주자 축에도 못 들었다. 재능이 없는 것보다 어설픈 재능이 오히려 문제였다고, 나는 자주 생각했다.


타고난 운동신경과 손재주가 있어서, 형은 무엇이든 금방 배우고 곧잘 따라하고 곧잘 했다. 축구든 농구든 언제나 평균 이상으로 했고, 스키를 처음 타러 가도 남들보다 한참이나 먼저 감을 익혔다. 기타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이 F코드를 잡으려고 낑낑댈 때, 형은 처음치고는 무척이나 빠르게 코드를 잡아냈다. 복잡한 스트로크도 조금만 궁리하면 금방 구사했다. 교회에 있는 드럼에 앉아서 어설프게 '퉁탁탁 퉁탁탁' 두드려보더니, "아~" 하고는 금세 괜찮은 흉내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요령이나 타고난 센스가 좋았다. 금방 치고, 잘 치니까 기타도 시작하게 된 거였다.


호기심이 많아서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지만, 그만큼 포기도 빠른 형이었기에. 재수까지 한 기타를 빠르게 접은 것이 의아하지 않았다. 아니다 싶은 건 빠르게 포기하는 것도 용기니까. 또 기타를 그렇게 잘 치는 편도 아니었으니까. 결정에 공감했다. 내 생각에 형은 옳은 판단을 한 것이었다.


형은 전역 후에 몇 달 바짝 돈을 벌어가지고는 친구와 함께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도시의 이곳저곳을 청소하며 돈을 벌었다. 쉐어하우스를 구해 작은 방에서 사람들과 부대껴가면서, 때로는 나에게 큰 금액의 용돈을 보내주기도 하면서 1년을 살아냈다.


당황스러운 것은 한국에 돌아온 이후였다. 형 이제 뭐할 거야? 물었더니. 형은 대뜸 대학엘 가겠다고 했다. 오래 전 포기했던 실용음악과 기타 전공으로. 24살이라는 나이가 당시에는 너무나 많아보였고, 머릿속으로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말들이 가득 떠올랐지만 내뱉을 수는 없었다. 살면서 본 적 없는 형의 어떤 결연한 표정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이가 너무 많지 않아?"

내가 묻자 형이 대답했다.

"형이 대형 면허도 있잖아. 트럭이나 버스 운전을 할 수도 있고, 다달이 얼마씩 돈 버는 건 어렵지 않겠더라고. 그런데 그런 건 나중에 서른 넘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야."


그 대답이 너무 명쾌해서 나는 무슨 말을 더 얹을 수도 없었다.


형은 1년간 기타 입시에 매진했고, 다음해 전문대 실용음악과로 진학했다. 이름있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서 나름대로 즐거운 대학생활을 했다. 그렇게 대학교를 졸업하자, 형은 미련없이 음악계를 떠났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한 것처럼. 무언가 훌훌 털어버린 것 같았다. 조금의 아쉬움도 보이지 않았다. 연주자가 된다거나, 밴드를 결성한다거나, 작곡을 한다거나 하는 행동은 시도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음악과는 무관한 일을 하며 살고 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도 실패할 수 있다."

짐 캐리는 아버지를 보면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코미디언 대신 안전한 회계사를 선택했지만 짐캐리가 12살이던 해에 해고를 당했고 가난하고 힘든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면서. 그 때문에 자신은 큰 두려움 없이 코미디언을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짐 캐리의 대학 졸업 연설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형을 떠올렸다. 형은 아마 짐 캐리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형은 평범하고 안전하게 후회하기보다는, 조금 뒤쳐져 걷더라도 후련한 마음으로 걸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형에게는 '음악'이라는 것이, '실용음악과 기타전공'이라는 것이 어떤 미련이었던 것 같다. 그걸 해결하지 않고는 앞으로의 삶을 이어나갈 수 없는. 평생의 후회로 남을 그런 것. 세상에는 그 미련을 해결하지 못해서 죽기 전까지 낑낑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20대의 몇 년을 거기에 쓰더라도, 용기있게 그 미련을 해결해버린 형의 결정에 나는 공감한다. 형은 비로소 옳은 판단을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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