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May 15. 2023

스포츠는 완전하다

픽션보다 논픽션

언젠가부터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의 소개로 야구를 접하게 되고, 류현진이 리그를 씹어먹던 그 시절의 한화를 응원한 적이 잠깐 있었으나 오래가진 않았다. ‘K리그는 도대체 누가 보는 거지?’하는 의아함도 오래 가지고 지냈다. 대학교 때 FC안양을 진심으로 응원하던 선배가 있었는데 그 취향을 존중하는 척했지만 속으로 갸우뚱할 뿐이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WBC 같은 국가대항전이 아니면 스포츠에 좀처럼 몰입할 수가 없었다.


그랬던 나는 이제 모든 종류의 스포츠를 무차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직접 보는 것이라면 핸드볼이든 고등학교 축구부 주말리그든 대환영이다. 겨울에는 꼭 배구장에 가고, 여름에는 상암이나 잠실로 축구, 야구를 보러 간다. 예전에는 응원하는 팀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이제는 응원하는 팀이 아니어도 즐겁게 관람할 수 있다. UFC 경기를 챙겨보고, MLB에서 활약하는 좋은 선수들의 클립도 자주 찾아보면서 즐거워한다. (특히 유튜브에 올라오는 김하성의 데일리 하이라이트를 보는 것은 인생의 큰 행복 중 하나다.)


“감독님의 남은 인생동안 절대 영화를 볼 수 없는 것과 절대 스포츠를 볼 수 없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우디앨런은 한 인터뷰*에서 기자의 질문을 받자마자 아주 쉬운 질문이라는 듯 지체 없이 대답했다. “영화를 포기하겠습니다.”


인터뷰 영상을 처음 봤던 당시의 나는 한창 영화의 세계에 빠져 수백 편의 영화를 섭렵하고 있을 때여서, 우디 앨런의 대답에 꽤나 놀랐다. 영화를 포기한다고?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으니 예술가 특유의 허세를 부린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지금은 그의 대답에 완벽히 공감한다.


스포츠를 좋아하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주 많은 영화를 본 다음이었다. 부처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불현듯 깨달음을 완성한 것처럼.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영화는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지어낸 것에 불과하고, 스포츠는 아무리 지루하더라도 꾸며내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영화에서 만년 꼴찌 팀이 압도적인 1위 팀을 꺾을 때 우리는 전율한다. 그것이 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가볍고 연약한, 만들어진 기적에 불과하다.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영화에서 약자가 논리적으로 패배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가는 망하기 십상이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남녀가 정말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야기, 약팀이 강팀에게 패배하는 이야기, 복수에 실패하는 이야기, 살인마에게 무력하게 살해당하는 이야기를 보러 극장에 가는 관객은 많지 않다. 영화는 기적을 지어내고 열심히 변명해볼 뿐이다.


반면 스포츠의 세계는 정말 살아있다. 언더독은 탑독에게 얻어맞고, 약팀은 강팀에게 패배하기 일쑤다. 1할 타자는 여지없이 헛스윙을 하고, 하위 팀 프로게이머는 스킬을 빗맞춘다. 그것이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스포츠를 볼 때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하는 일은 없다. 높은 연봉의 선수가 잘하는 것, 높은 순위의 팀이 이기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살아있는 기적의 힘은 그 공고한 질서의 틈에서 만들어진다.


스포츠의 지루한 순간들은 적립이 되는 것 같다. 무심결에 뻗은 스트레이트가 챔피언의 턱에 꽂히고, 1할 타자가 승부처에서 홈런을 치는 일이 일어날 때, 그 모든 지루한 순간들을 일시불로 보상받는 기분이다. 실망과 지루함이 클수록 보상의 순간이 짜릿할 것이기에 스포츠에서는 패배조차도 즐거운 복선이나 마찬가지다.


죽은 아름다움은 살아있는 추함을 이길 수 없고, 픽션은 논픽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해가 거듭할수록 더 실감하게 된다. 과거의 내가 어떻게 스포츠보다 영화를 더 좋아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봉준호가 <기생충> 같은 작품을 홍상수처럼 찍어내고, 알폰소 쿠아론이 <그래비티>보다 10배 좋은 작품을 만들어본들, 2002년 안정환의 골든골보다 감동적일 수는 없을 텐데.




*우디앨런이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12개의 질문 인터뷰(2010) https://youtu.be/lfW3OglMPEE

매거진의 이전글 5Whys를 어디서 배웠나 했더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