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단편소설
연지는 나와 있을 때 뜬금없이 울곤 했다.
“이 순간이 가슴 벅차게 소중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
연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언제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자신으로 중첩되어 있는 기분이라고 했다. 멋진 여행지에 가면, 그곳에 가고 싶었던 과거의 자신과, 여행지에서 실시간으로 존재하는 현재의 자신과, 아주 먼 미래의 자신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다고. 몇 년 전 노르웨이의 절벽에서 바다를 내려다볼 때, 그녀는 과거의 기대감과, 현재의 감동과, 미래의 그리움을 동시에 느꼈다고 했다.
“석현아. 네가 내 첫사랑이야.”
연지가 부은 눈으로 말했다. 나와 함께 있으면 과거의 설렘과, 현재의 편안함과, 미래의 그리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했다. 연지는 내가 너무 좋아서 감당할 수 없게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했다. 도대체 나의 어떤 면이 그녀에게 그렇게 사랑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연지의 과도한 감성이 가끔 부담스러웠다.
연지는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10년 후의 자신이 되면 된다고, 그걸로 부족하면 20년 후의 자신이 되면 된다고 했다.
‘무슨 일이든 먼 훗날엔 그리워져.’
엄청나게 힘든 일이라면 죽기 직전의 자신이 되어버린다고 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지고, 심지어는 지금의 고통마저 생생히 살아있는 자의 배부른 투정처럼 느껴진다 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반대였다. 과거의 자신이 되어 지금의 자신을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수없이 넘나드는 그녀의 마음가짐이, 부럽기보다는 무척 피곤해 보였다. 연지는 오래전부터의 습관이라 자신에게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도 그래 보이긴 했다.
나는 연지를 중첩인간이라고 불렀다. 연지는 그 별명을 마음에 들어 했다.
“맞아. 나는 중첩인간이야. 너를 모든 순간의 나로 사랑해.”
생각할 틈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로맨틱한 멘트에 심장이 조금 쿵했다. 연지를 가볍게 안아주고, 볼에 뽀뽀를 한 번 해주었다. 연지가 부끄럽다는 듯 몸을 배배 꼬았다.
그리고 잠깐 마음이 무거워졌다. 연지와 달리 나는… 지금을 살아가기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의 마음으로 연지를 사랑하기도 버거웠다.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세 배로 나를 사랑한다는 연지처럼 나는 연지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서. 그게 무슨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연지야. 나 알바 가야겠다. 벌써 다섯 시네.”
“이번 달 내내 마감이랬지?”
“응, 방학이잖아. 요즘 가게 손님 넘쳐.”
“힘들겠다. 잘 다녀오구. 끝나면 연락해”
“알겠어.”
술집에는 늘 진상이 가득했다. 오늘도 바닥에 토하는 손님이 있었고, 3번 테이블에서는 다섯 번이나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아예 한 움큼을 집어서 테이블에 올려주었더니, 내가 화나서 그런 줄도 모르고 까르르 웃었다. 한때 짝사랑하던 다미는 또 울상이었다. 점장 형에게 맞으면서도 바보처럼 헤어지지를 못했다. 연애를 왜 그렇게 하냐고. 그 형이 뭐가 그렇게 좋냐고. 아무리 물어도,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오늘 마감조는 다미와 나 둘 뿐이었다. 운동삼아 좀 걸을 겸 해서, 다미를 자취방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10분 거리였는데, 다미는 내내 점장 형 욕만 해댔다. 맨날 바람을 피우고, 술만 먹으면 자기를 의심하고 때린다고. 그러다 엉엉 울었다. 다미의 집 앞에서 나도 모르게 다미를 껴안아 주었다. 무슨 그런 쓰레기를 만나서 고생이니, 당장 헤어져라. 같이 성을 내주었다. 문득 울음을 뚝 그친 다미는 내 품에 안긴 채로 무슨 고양이처럼 나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치치 보고 갈래?”
“치치?”
“내가 키우는 고양이.”
어영부영 다미의 방으로 들어가게 됐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연지가 실망할 텐데. 몇 번이나 뿌리칠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허겁지겁 옷을 벗고 다미와 몸을 섞는 동안, 연지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잔상 속에서도 연지는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
[어젯밤에 어디에 있었어?]
다미 침대에서 눈을 떴다. 어디에 있었냐는 단 하나의 카톡 메시지에 심장이 지하주차장까지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다미는 벌써 나갔는지, 안 보였다.
[퇴근하고 뻗었어]
[어제 갑자기 보고 싶어서 자취방 갔었는데 없던데]
[왜 말도 없이 오고 난리야]
[보고 싶었어]
[친구들이랑 술 마셨어. 친구 집에서 잠들었어. 민수 알지? 지금 민수네 집이야]
[말해주지]
[미안.]
[알겠어]
[숙취가 너무 심하네. 연지야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알았어. 컨디션 같은 거 사 먹어 물 많이 마시구]
연지가 너무 고분고분해서. 순수해서, 아니 멍청해서 갑자기 화가 났다. 그 멍한 말투와 목소리가 갑자기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졌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연지가 바로 받았다.
“어 난데, 방금 거짓말했어. 다미 알지? 같이 일하는 애. 어. 나 어제 다미랑 잤어. 같이 퇴근하고 얘기하다가 그렇게 됐어. 미안해. 그리고 이 말하려고 전화했는데… 우리 헤어지자. 솔직히 나 너 언제부턴가 부담스러웠어. 네가 생각하는 방식도 나는 이해 못 하겠고, 그냥… 부담스러워. 과거가 어쩌고 미래가 어쩌고 하는 거 더 이상은 못 들어주겠어. 연지야. 네가 왜 그렇게 태평하게 살 수 있는 줄 알아? 아무것도 책임질 게 없어서 그래. 집 잘 살고, 그래서 돈 안 벌어도 되고 용돈 받으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대학만 다니면 돼서, 그래서 그래. 제대로 힘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고고할 수가 있다고. 너 10년 뒤에도, 회사 다니면서도 그렇게 말랑말랑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술집에 얼마나 이상한 손님들이 많은지 넌 모르지? 그런 사람들이 행패 부리는 거 맨날 보면, 제 아무리 너라도 그런 말 못 해. 아무튼 나 이제 너랑 못 만나겠어. 나 그렇게 좋은 사람도 아니니까,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해. 내 말 알아 들었어?”
연지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없이 있다가. 느린 말투로 대답했다.
“응.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래, 그렇게 하자. 근데 조금 슬프긴 하다. 알겠어. 잘 지내.”
마지막까지 연지는 그렇게 답답한 말투와 목소리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화를 내지. 고마운 게 아니라 지긋지긋했다. 지긋지긋하다는 그 말이 딱 어울렸다.
연지와 헤어지고 다미와 사귀기로 했다. 소식을 들은 점장 형은 내 자취방까지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다. 내가 욕을 하자 대뜸 날라차기를 했다.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집이 완전 난장판이 됐다. 에라 모르겠다, 점장 형 얼굴에 주먹을 마구 날렸다. 경찰까지 오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가락이 조금 찢어져 있었다. 몇 바늘 꿰매야 했다. 알바는 당연히 그만두었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돈도 없어서 시흥의 어느 맥주 공장에서 단기로 일하기로 해다. 보리 포대를 나르는 게 다였다. 몸이 힘드니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좋았다. 다미는 밤만 되면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얼마 뒤 다미가 헌팅포차 같은 곳을 다니며 남자들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점장 형이 맨날 의심한다더니, 그럴 만했네.”
다미는 자기가 잘못해 놓고 역정을 냈다. 별 고민도 없이 헤어졌다. 하나도 슬프지가 않았다.
*
“고생했다. 마지막으로 맥주 한 잔 먹고 가라.”
알바 마지막 날. 소장이 종례시간에 알바생들을 바닥에 앉히고 말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열심히 일해주어서 고맙다고, 이런저런 어른스러운 말을 했다. 소장은 맥주 공장에서 갓 생산된 생맥주만큼 맛있는 게 없다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큰 스테인리스통에서 맥주를 한 잔씩 따라 주었는데, 말한 대로 정말 끝내주게 맛있었다. 일이 힘들어서 맛있는 건지, 진짜 갓 생산된 맥주의 위력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사당까지 가는 퇴근용 봉고차에 몸을 실었다. 다들 피곤했는지 금세 곯아떨어졌다. 나는 멍하니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름달이 뜬 것 같은데, 차창에 얼룩이 많아서 깨끗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요철을 지날 때마다 창문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시끄러워서 창문을 아예 내려버렸다. 소음이 조금 줄어들었고,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달이 깨끗하게 보여서 좋았다.
문득 연지가 떠올랐다. 연지의 얼굴과, 웃는 모습도 떠올랐다. 연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잘 지내라는 말. 그날 이후로 연지를 볼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다. 너무 당연한 건데. 그런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조금 눈물이 났다. 밝게 빛나는, 여전히 고요한. 핸드폰 배경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1시 59분이 00시로 변했다. 먼 곳에서 째깍째깍 하는 시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연지의 웃는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나는 좁은 시트에 웅크리고 앉아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여전히 덜컹거리는 봉고차 속에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 모든 순간의 나로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