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두 번씩 살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
수진이가 물었다. 창밖은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푸르스름한 어두움으로 가득 차있다. 잔잔하고 축축한 빗소리. 카페 2층에는 손님도 없다. 세상이 점점 조용해지는 기분이다.
"하루를 두 번씩 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묻자, 수진이가 대답했다.
"하루를 살고 자정이 되면 모든 게 리셋 되는 거지. 첫 번째 날은 사라지고 두 번째 날로만 인생을 사는거야. 6월 1일. 6월 1일. 6월 2일. 6월 2일. 6월 3일. 6월 3일…… 그렇게 평생 산다고 치면."
“글쎄, 나라면 하루는 조금 막 살고, 하루는 제대로 살 것 같은데.”
“하루는 왜 막 살아?”
사실 별 생각 없이 대답한 건데 너무 진지하게 물어보니까 괜히 고민해보게 된다. 하루를 두 번씩 살 수 있다면? 생각보다 좋을 것 같다. 무슨 실수를 해도 없던 일이 되는 거니까, 모든 걸 다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시험기간에는 공부를 두 배로 할 수 있는 거니까 몇 배는 유리하겠다.
“하루를 막 살아도, 어차피 사라지니까 해보고 싶은 걸 실컷 해봐도 되는 거잖아. 당첨번호를 기억해놨다가 로또복권을 산다든지. 금방 부자되겠다.” 내가 대답하자 수진이는 쿡쿡 웃었다.
“그렇긴 하겠네. 근데 로또복권 번호는 추첨 다시 하면 바뀔 것 같아.”
일리가 있다. 주사위를 두 번 던지는 거랑 비슷한 셈이니, 당첨 번호도 바뀌겠지.
“그래도 시험기간에는 두 배로 공부를 할 수 있으니까. 그건 좋을 것 같네.” 대답하면서 수진이 얼굴을 봤는데. 수진이는 벌써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건 좋을 것 같네.” 수진이의 눈웃음.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눈이 저렇게 될 수 있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내가 묻자. 수진이는 “그냥 재밌잖아. 이런저런 상상해보는 거.” 하고 대답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창밖을 쳐다봤다. 내려다 본 거리에는 사람들이 분주한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들 우산을 들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고 색색이 펴진 우산과, 사람들의 다리만 보였다. 우주에 행성이 떠다니듯 동그라미들이 걸어 다녔다.
“그러면, 이건 어때?”
수진이가 다시 무슨 말을 시작했다. 살다보니 수진이와 나란히 카페에 앉아서 얘기하는 날도 생긴다. 그 사실이 문득 신기했다.
학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진이를 만났다. 갑자기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바람에 바로 보이는 상가로 몸을 피했다.
'뭐 좀 마시면서 비 그치는 거 기다릴래?' 수진이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물었다. 그러자고 했고, 그래서 이렇게 같이 앉아있게 된 것이다.
"듣고 있어 내 말?" 아, 수진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응? 뭐가?” 내가 대답했다.
“하루를 두 번씩 사는데, 이번에는 첫 번째 날이 남고 두 번째 날이 사라지는 거야. 그러면 어떨 것 같아?”
“음... 그건 조금 쓸데없을 것 같은데.”
“왜?”
“첫 번째 날이 연습이면, 두 번째 날은 더 잘 살 수 있을 텐데. 첫번째 날만 남는 거면, 두번째 날 잘 살아봐야 의미 없잖아.”
“그럴 수도 있겠네.”
수진이와 대화를 해본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오늘 숙제 뭐였지?' 그렇게 묻길래 한 번 대답을 해준 날이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같은 학원을 다닌 지 벌써 두 달이나 됐지만 가벼운 인사 정도. 그 외에는 딱히 이야기 할 기회조차 없었다.
최근에는 수진이가 나오는 꿈을 종종 꾸었다. 예쁘니까 당연한 건가 싶다. ‘소나기 같은데 카페에 있다가 그치면 집에 갈래?’ 그렇게 말하는 수진이가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꿈을 자주 꿔서 그런지 낯이 익는다고 해야 하나.
“하루를 그렇게 두 번씩 살면 되게 착하게 살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하루는 맘에 안 들어도 조금 참고 다음날 실컷 신경질내면서 살면 되잖아.”
내가 말하자 수진이가 장난스럽게 킥킥 웃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줄만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게 뭐야. 너답네” 하면서 수진이는 푸하하 웃었다.
“너는 어떨 것 같은데?”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수진이는 잠시 천장 어딘가를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시선을 천천히 내리면서 입을 열었다.
“하루를 두 번씩 살아도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 것 같아. 번갈아 다른 사람이 되는 건 피곤한 일이잖아.”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 내가 묻자 수진이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올렸다가 내렸다.
“가끔은 조금 일탈을 하겠지. 마음 가는대로.”
나는 수진이 대답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문득 ‘너답네.’ 하는 수진이의 말을 떠올렸다. 너답다는 건 무슨 뜻일까.
‘꼭 비 내ㄹ, 째 날 는…’
그 순간, 귀로 무슨 먹먹한 소리가 스쳐 지나갔고, 나는 화들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적한 카페 2층 구석에, 손님은 우리 둘 뿐이었다.
"아, 미안. 뭐라고 말했어?"
“가끔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것 같다구. 너 안 듣고 있었지?”
고개를 갸웃하고. 수진이 얼굴을 한 번 보고. 미안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행히 수진이가 웃어줬다. 그리고 나서는 할 말이 떨어져서, 눈알만 굴렸다. 수진이도 어색하게 테이블만 쓸었다. 둘 다 괜히 머쓱해져서 창 밖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빗줄기는 그칠 기미도 없이 투명한 유리창을 계속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앉아서, 비가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