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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Sep 12. 2023

느빠빠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칙이 있다는 게

교회를 10년 다녔다. 10살 때부터 20살 때까지. 대단한 신앙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놀러 다닌 셈이었다. 20살이 되니까 세상에 재밌는 게 너무 많아져서, 뒤도 안 돌아보고 작별했다. 나를 아껴주셨던 교회의 수많은 어른들께는, 지금도 조금 죄송한 마음이 있다.


우리 교회 중고등부에는 이른바 조금 논다는 형, 누나들이 많이 다녔다. 그런 형 누나들이 친구들까지 데려오는 바람에 교회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날티가 나는 점도 매력이었다. 수련회에 가면 나를 망보도록 하고, 몰래 구석에서 담배를 피운다거나, 술을 마시는 경우도 있었다. 어릴 때는 그런 형 누나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이 꽤나 우쭐한 기분이기도 해서, 나름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설교를 질리도록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성경의 여러 일화에 대해 구석구석 알게 된 것도 감사한 일이다. 그게 살아가면서 얼마나 큰 교양이 되는지 모른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미술 작품을 보거나, 영화를 볼 때마다 그 작품들 속에 배어있는 기독교적 상징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때. 그 섬세한 상징들을 어루만지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꽤나 자랑스럽다.


교회에서 중고등부 회장도 했었다. 믿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늘 죄책감을 느꼈지만, 나 말고는 딱히 할 사람도 없었고, 하라니까 했다. 어느 날은 그런 적도 있었다. 여름방학에 중고등부 수련회를 계획하던 시즌이었는데, 전도사님이 2박 3일 동안의 일정을 한 번 짜보라고 하셨다. 내 나름대로 이런저런 레크리에이션을 넣고, 휴식시간도 넣고, 열심히 프로그램을 짜서 보여드렸는데, 그때의 전도사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무척 당황해하시면서 "아니 서댐아, 예배 시간이 아예 없잖아." 하셨다. 다시 보니 정말 일정표에 기도나 예배 이런 건 하나도 없고 온통 물놀이와 레크리에이션, 야밤의 납량특집, 마피아 게임으로만 가득했다. 아마 꿀밤을 맞았던 것 같다.


인생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건 거기서 기타를 배웠다는 것이다. 잘 치지는 못하지만, 웬만한 곡은 악보가 있으면 코드를 금세 잡을 수 있는 정도,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정도까지 익혔다. 지금도 심심할 때면 기타를 치면서 노니까, 평생 함께할 수 있는 소중한 취미도 교회에서 얻어온 것이다. 중고등부 회장을 하던 때에는 예배 전에 앞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활동도 1년 정도 했었다.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매주 사람들 앞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경험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교회에서는 그런 역할을 맡은 사람을 '찬양 인도자'라고 불렀는데, 사실은 나보다 우리 형이 먼저였다. 말하자면 형에게 물려받은 자리였던 것이다. 직책을 넘겨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인수인계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가사를 표시하는 PPT를 만드는 법, 종이 악보를 만드는 법, 아침에 악기와 마이크와 스피커를 세팅하는 법도 알려주었다. 


형은 이런저런 주의사항들을 알려주면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게 있다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서댐아. 가장 중요한 게 있는데, 선곡을 할 때는 무조건 느빠빠느야. 알겠지?" 

"느빠빠느? 그게 뭔데?"

"느린 곡, 빠른 곡, 빠른 곡, 느린 곡 순서로 배치를 해야 한다고. 이 원칙은 무조건이야."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찬양은 네 곡을 하게 되어있는데, 무조건 '느빠빠느'의 순서로 선곡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그랬다. 우리 형도 그랬고, 그 전의 다른 형도 그랬고, 그전에도 그랬고. 다른 교회에 가보아도 그랬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어쩐지 실망스러운 기분을 한가득 느꼈다. 나를 예배의 신성함에 녹아들게 했던 그 찬양의 시간이, 때때로 느꼈던 감동들이 '느빠빠느'라는, 일종의 심리 기술의 효과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느빠빠느'의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따금 저항이라도 하는 마음으로 '빠느느빠'의 선곡을 한 적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도통 예배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비밀스러운 전통은 괜히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천천히 다가가서 마음을 열고, 그다음에 다이내믹을 만들고, 감정을 끌어올렸다가 부드럽고 천천히 매듭지으며 여운을 만드는 것. 좋은 영화, 좋은 연주, 좋은 섹스, 좋은 대화는 모두 '느빠빠느'였던 것 같다.


나는 '느빠빠느'의 그 마법 같은 효과에 감탄하면서도, 그걸 의식하게 될 때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이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소설은 3막 구조이고, 음악은 벌스와 코러스고, 파인다이닝은 언제나 상큼한 애피타이저에서 묵직한 메인요리, 달콤한 디저트의 순서라는 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법칙이 있다는 게. 가끔은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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