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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Sep 04. 2023

민방위는 진짜 아저씨들이 하는 거 아니었나

서른둘입니다. 죄송하지만 나이 얘기 잠깐 해보겠습니다.

'살아온 날 중에 가장 늙었고, 살아갈 날 중에 가장 젊다.' 


누가 처음으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되뇌일 때마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앞의 문장으로 일분일초도 허투루 살 수 없다는 조바심을 느끼게 하는 한 편, 뒤따라 오는 문장으로 넌지시 희망을 쥐여준다. 이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살아갈 날 중에 가장 젊다는 뒤의 문장보다는 살아온 날 중에 가장 늙었다는 앞의 문장에 더 마음이 기운다. 언제나, 내가 좀 늙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30대 초반에 나이 얘기를 하기가 참 민망하기는 한데, 그래도 나이 듦에 대해서 점점 더 자주 실감하게 된다. 저번 주에 민방위 훈련 통지서를 받으면서도 그랬다.


민방위라는 것에 일단 한 번 놀랐다. "민방위 훈련은 진짜 아저씨들이 가는 거 아니었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번 더 놀랐는데, 내가 민방위 2년 차였다는 사실이다. 1년 차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데 왜 2년 차가 되었나요. 차가 없는데 주차 딱지가 날아온 기분이었다. 주민센터에 문의하니, '작년에 인터넷으로 이수하셨네요. 코로나 시국이라.' 하는 건조한 답변이 돌아왔다. 머쓱하게 전화를 끊었다.


어릴 때 꽤나 재밌게 본 영화가 있었는데, 장진 감독의 <라이터를 켜라>였다. 주인공이 예비군 훈련에 갔다가 마지막 돈을 털어서 산 300원짜리 라이터를 잃어버리고, 그걸 되찾기 위해 우여곡절을 겪는 이야기였는데, 영화 속에서 예비군 훈련을 받는 김승우 배우의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내 어린 눈에 영화 속 김승우가 너무나 영락없는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후로도 '아저씨'라는 개념을 상상할 때마다 예비군 훈련을 받는 성인 남성의 이미지와 연결 짓곤 했다.


그런데 내가 민방위라니. <라이터를 켜라> 속 주인공보다 나이 많은 진짜 진짜 아저씨가 되었다니. 예비군도 귀엽게 느껴지는 민방위라니. 걷잡을 수 없이 쓸쓸해지기 시작했다. 참 묘한 울적함이었다. 어떤 울적함이냐면, 어디 가서 말도 못 하는 울적함이다. 웬만한 어른들은 "야. 나이가 들어? 30대 초반이면 전 재산하고도 바꾸겠다 임마" 하면서 거의 주먹질을 하시기 때문에 그렇고. 20대 동생들은 진심으로 안쓰럽게 느끼는 묘한 표정을 짓기 때문에 그렇다. 어리지도 않고, 막 많지도 않아서 마침 엄살도 못 부리는 그런 쓸쓸함이 주변을 맴돈다.


나이 들었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순간에 그렇다. 사귀던 여자친구라든가 동생들하고 신나게 떠들다가 대학교 때 얘기를 하면 10년 전 일이다. 군대 얘기를 해도 10년 전 일이고, 롯데월드에서 막 춤을 추면서 알바하던 때가 10년 전 일이다. 엊그제 까지는 아니어도 불과 몇 년 전 일 같은데, 그게 벌써 10년 전이라는 계산이 되면 나도 좀 나이 먹었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어린아이들이 나를 형이나 오빠라고 부르지도 않을뿐더러, 그래서도 안 될 것 같을 때. 나이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이 건강 챙기기 시작하고, 탈모약 먹고, 자발적으로 (살려고)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나이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동생들이 결혼 언제 할 거냐고 물을 때도 그렇고, 내가 군대 갈 때 태어난 아이들이 막 중학교 갈 준비하는 걸 볼 때도 그렇다.


얼마 전에는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와 정말 동안이세요, 20대로는 안 보이지만!"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제 나이가 서른둘인데, 동안이면서 20대처럼은 안 보이는 거면..." 하면서 말을 흐렸는데. 끝까지 20대 같아 보인다고 정정은 해주지 않으셨다.


이렇든 저렇든 아무튼 예비군은 끝났고, 만으로 나이를 세도 20대는 어림없고, 나는 이렇게 애매하고 쑥스러운 나이만큼 늙어버렸다. 셋째 주에 나는 민방위 훈련을 받으러 간다. 오후 4시간. 무의미한 훈련을 받는다는 것 자체도 피곤하지만, 훈련 통지서에 적혀있는 내 소속까지 마음에 안 든다. 상황전파 2분대라니. 너무 하찮다. 이왕 받는 훈련, 좀 멋있는 거 없을까. 나라에 큰 재난이 발생했는데 나에게 주어진 임무가 고작 '상황전파'라니. 1분대도 아니고 2분대라니. 지금 이 글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울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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