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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Sep 15. 2023

16기 광수, 그의 나이스한 찌질함

<나는 솔로> 16기 광수님을 보면서,

<나는 솔로> 16기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것은 '빌런'이라 불리는 영숙의 이상한 처세와, 엉뚱하고 솔직한 매력의 상철인 것 같지만, 나는 늘 광수를 관찰하게 된다. 그의 입체적인 모습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나이스함과 찌질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영민함과 어리석음이 동시에 느껴진다. 과감함과 주저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어른스러움과 미숙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처음에는 그의 한심함에 화가 났다가, 어느 순간에는 안쓰러웠고, 이제는 응원을 하고 싶어졌다.




사회에서 편하게 쓰는 말로 '나이스하다'는 표현이 있다. 영어 단어 'Nice'에 한국어 '-하다'가 붙은 조금 이상한 형용사인데, 우리말로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는 뉘앙스가 있는 것 같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쓰는 말이긴 한데 '성격이 좋다', '멋지다', '쿨하다'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나이스'란 무엇인가. '나이스'하려면 일단 어른이어야 한다.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그 사람 참 나이스하다'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나이스함'에는 어느 정도 어른스러운 덕목이 내포되어 있다. 그냥 착하기만 해서도 안 된다. 지적인 매너를 갖추고 있는 느낌이어야 한다. 질척거리지 않아야 한다. 구구절절 뭘 설명하거나, 집착하거나, 인색해서도 안 된다. 쉽게 말해 짜치는 느낌이 있으면 안 된다.

SBS PLUS·ENA 캡처

<나는 솔로> 초반부의 광수는 어떤가, 사람이 좀 '나이스'한 면이 있다. 서글서글한 인상, 스윗한 목소리, 눈치 빠른 자상함을 갖췄고. 위트 있고, 아마도 좋은 학교 출신에, 세계 여행을 할 만큼 낭만적인 데다가, 대기업을 다닌 경력도 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 잡은(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스타트업의 대표다. 앞서 설명한 어른스러우면서 지적이면서 짜치지 않는, '나이스'한 40대 초반의 남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나이스함이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는다. 그는 옥순과 충분히 좋은 감정을 교환했으면서도 여기저기 눈을 돌린다. '알아본다'는 명분으로 어설픈 보험을 들려고 한다. 혹은 자신에게 스치는 다른 여성들의 관심들을 만끽하려고 한다. 영숙이나, 영철, 영자의 말에 쉽게 현혹된다. 옥순이 여전히 좋은 감정이라고 말해주는데도 그 말을 곡해하고, 혼자 토라지고, 속 좁게 군다. 낙동강 오리알이 되자 엉엉 운다. 숙소에서 탈주해서 교회를 찾기도 한다. 나중에는 자포자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일관한다. 엄한데 화풀이를 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찌질하다. 찌질한 남자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SBS PLUS·ENA 캡처

그렇다면 광수는 나이스한 사람인가, 찌질한 사람인가. 찌질한 사람이 나이스한 척을 하려다가 실패한 걸까, 아니면 나이스한 사람인데 일이 너무 꼬이니까 찌질함이 발생한 걸까? 나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저 그 모두를 동시에 갖고 있는, 그러면서도 늘 충돌하는 여린 인간 같다.


광수에게는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이 보인다. 초반의 '나이스'한 광수의 모습은 그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모습이다. 그가 오랜 시간 천천히 다듬어낸 모습이다. 그런데 그 이상에 비해 그의 타고난 기질은 연약하다. 마이크 타이슨이 말한 적도 있지 않나.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그의 '나이스함'은 스파링처럼 안전하고 일상적인 수준에서는 곧잘 통할지 몰라도, 실전격투의 날카로운 갈등상황에서는 금방 밑천을 드러내고 만다.


한껏 좋은 사람이었다가 바닥을 보이며 추락하는, 광수는 아마 그런 무너짐을 수없이 겪으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그가 엎드려 엉엉 울 때, 나는 그의 등에서 "나는 또 이 모양이네."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이스하려고 했지만 결국 찌질함을 드러내 버린 그의 반복적인 무너짐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SBS PLUS·ENA 캡처

내 생각에 광수는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궁금한 걸 날카롭게 질문하는 것 같지만 끝까지 캐묻지는 못하고 한 발 빼는 모습, 화를 내지만 악을 쓰지는 못하는 모습, 쿨한 척 괜찮다고 말하면서 혼자 몰래 훌쩍이는 모습을 보면, 악인이 될 그릇은 안 돼 보인다. 자기 잘못으로 일이 꼬여버려서 속이 뒤집어지는데, 그래도 최악은 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같아서 조금 짠하기도 했다.


그런 광수에게 왜 감정이입이 되냐면, 사실 내가 좀 그렇다. 나도 광수처럼 스스로 도달하고 싶은 이상적인 모습이 있고, 그걸 위해 막 노력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질 때가 있다. 막 유치한 걸로 친구나 연인과 싸우고, 속 넓은 척하다가 혼자서 고민에 잠겨 끙끙 앓고, 어설프게 화내고, 어설프게 짜증 내고, 잘해주다가 혼자 지쳐서 나가떨어지고… 내가 아는 내 약점을 광수를 통해서 보게 되니까, 조금 씁쓸했다. 화가 난 건 그래서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노력 가상하지 않나.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열심히 연기를 해보는 게, 장점이면 장점이지 기만이나 사기행위처럼 생각되지는 않는다. 광수가 반복하는 나이스함과 찌질함의 충돌이, 나는 성장하는 자의 덕목이라고 느낀다.


아스팔트는 아무리 깨끗이 쓸어 놓아도 깨끗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시골 마당만이 잘 쓸어 놓으면, 깨끗하다. 깨끗하게 쓸린 마당이야말로 선의 공간이다.
- 김현 <행복한 책 읽기> -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마당이 매끈하고 평평한 아스팔트보다 깨끗해 보인다는 김현 선생님의 말을 되뇌어 본다. 마당을 깨끗해보이게 하는 건, 열심히 쓸어낸 노력의 흔적이라는 말.


처음부터 나이스한 사람보다, 어쩌면 찌질함을 딛고 끝내 나이스해지는 사람이 더 멋있는 것 아닌가. 그가 습관처럼 사용하는 '리셋'이라는 단어야 말로, 성장에 대한 그의 의지를 드러내는 말 아닐까.


<나는 솔로> 16기가 끝나 간다. 모두가 영숙을 욕할 때도 꾸준하게 광수를 고까워하던 나는 이제 진심으로 응원해 보려고 한다. 그와 그의 성장을. 아니, 사실 나와 나의 성장을. 광수 뿐만 아니라 모두가 아픔을 딛고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SBS PLUS·ENA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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