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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Oct 01. 2023

짝사랑이 어울리는 사람

머뭇거리고 서성이던 그때의 마음들

스무 살 때까지는 내가 짝사랑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학창 시절 내내 짝사랑하는 대상이 있었던 것 같다. 반이 바뀔 때마다, 무슨 활동을 할 때마다 누군가를 좋아하곤 했다. 흔히 말하는 숙맥이었고 고백할 용기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늘 그 정도 상태를 유지했다. 몰래 좋아하는 마음까지였다.


짝사랑에 익숙한 사람은 알 것이다. 마냥 슬프고 우울할 것 같지만, 오히려 안전하고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런 책임감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기분.


내가 좋아하고 싶을 때 좋아하고 싶은 만큼 좋아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일도 없고, 내 약점을 들킬 필요도 없고, 이루어지지 않아서 더 애틋하고 간절하고, 그러다 내 마음이 식어도 미안할 필요가 없고, 시간이나 돈이 들지도 않고, 필요한 건 그저 내 변덕스런 마음뿐. 이따금 느껴지는 열패감과,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비겁함만 참으면 짝사랑에는 리스크가 없었다.


내 마지막 짝사랑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꽤나 깊은 짝사랑이어서 각별하게 남아있다. 같은 과 동기였는데, K라고 부르겠다.


K를 좋아한 이유는 단순했다. 예쁘고 귀여웠다. 너무 말라서 내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그것도 상관 없어졌다. 160cm에 45kg. 많이 먹어도, 적게 먹어도 운동을 해도 안해도 늘 같은 몸무게라 했다. 그건 무슨 자랑도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듯 한 말이었는데 걔가 한 말이라면 나는 무엇이든 외웠다. 아니, 외워졌다.


수업시간 내내 틈만 나면 나도 모르게 K를 쳐다보았다. 같이 술을 먹거나, 어디를 이동할 때도 그랬다. 나중에는 160cm에 45kg의 생김새를 외워 버렸다. 그때의 훈련으로 한동안 나는 누구를 만나든 K를 기준으로 해서 키와 몸무게를 거의 정확히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짝사랑을 하는 사람이 상대방과 어떻게든 연결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금도 생각난다. 학과 회식이 있는 날, 술집까지 우리 과 인원 전체가 걸어가는데 나는 걸음의 속도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내가 어느 간격으로 걸어야 자연스럽게 K옆에 앉을 수 있는지를 계산했다. 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그랬다. 너무 바짝 붙으면 의도적인 것 같고, 그렇다고 안일하게 거리를 두면 완전히 멀어질 위험이 있었다. 간신히 K의 앞자리에 앉았는데, 사람들이 마구 밀어대며 구석으로 들어가라고 할 때의 기분이란, 선물 옵션으로 전 재산을 잃은 사람의 허탈함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 친구와 카카오톡 메시지를 할 때도 언제나 계산적이었다. 너무 빠르게 답장하면 연락에 목매는 구린 남자처럼 보일까 봐 답장 속도를 조절했고, 밤늦게 그 친구에게 답장이 오면 당장 답장을 할 수 있어도 일부러 읽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답장을 하면, 내일도 자연스럽게 이어서 하루종일 대화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연락을 이어가 보려고, 머리를 굴려가며 애를 썼다.


방학기간에는 가끔씩 전화를 했다. K는 "여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늘 "응~"이라고 말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그게 그렇게나 설렐 수가 없었다. 뭔가 우리의 연락이 당연한 느낌.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까르르 귀엽게 웃어주었는데. 그러면 나는 더 신이 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풀어놓곤 했다. 시답잖은 대화를 억지로 연장해 가면서 30분씩 통화를 하고 나면, 얘도 나 좋아하는 거 아닌가 착각이 들었다. 헷갈렸다.


이런 얘기들을 털어놓으면, 친구들은 언제나 속 편한 소리를 해댔다. "걔도 너한테 마음 있네.", "내 생각엔 백 퍼센트야. 고백해 봐!" 자기 일이 아니니까,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얘기였다. 내가 고백을 하면, 사귀든 차이든 자기들은 더 재미있을 테니까. 희망적인 얘기로 부추겼다. 나는 그런 가벼운 조언에 흔들리지 않고,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참지 못하고 그 해 여름 내지르듯 고백을 해버렸다.


"네가 남자로 느껴지지 않아."


나를 배려해 머뭇거리는 말투였지만, 그게 진심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승부가 난 이후로도 좋아하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서, 인공위성처럼 그녀 주위를 맴맴 돌았다. 정말 그때의 나는 인공위성 같았다.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 안전한 거리를 찾아서, 늘 그녀의 주변을 배회했다. 체념과 희망 사이에서 서성거렸다. 영원할 것 같은 마음이었지만 그라데이션으로 흐려지는 것이 신기했다.


그 이후로 짝사랑을 한 적은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있었지만, 절절하고 애틋하게 좋아했다기보다는 그냥 호감이었다. 그 정도의 마음은 금방 사라지거나, 혹은 상대방과 일치하면서 연애로 발전했다. 마음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반응을 느끼고, 이어지거나 거절에 수긍하는 단계가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어른의 단계로 점프한 기분이었다.


오늘처럼. 확신 없이 머뭇거리고 서성이던 그때의 마음이 불쑥 떠오르는 날이 있다. 누군가를 멀찍이서 좋아하던 마음을 떠올려 보면 뭔가 귀엽기도 하고, 찌질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고 그렇다. 연휴에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정신없이 살다가 갑자기 시간이 텅 비어버려서 그런 걸까. 누구 말마따나 자연이 진공을 허용하지 않듯이, 생각도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 걸까. '일이 없으면 회상이라도 해.' 뇌의 명령인가.


내가 누군가를 짝사랑했던 한동안의 기억, 누군가에게 짝사랑의 대상이 되었던 기억, 알콜솜처럼 빠르게 증발해버린 듯한 가벼운 연애의 기억, 어느 공간에서 공식 커플로 불리던 기억,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그 모든 일들이 머릿속을 슉슉슉 쓰다듬고 지나간다. 그런 기억들은 늘 이렇게 난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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