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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Nov 11. 2023

수화기 너머로 만난 사람들 - 대학교에서

대학교 교학팀에서

서울의 단과대학 교학팀에서 2년 간 일하는 동안에도 참 많은 전화를 걸고 받았다. 학적, 장학, 졸업과 관련된 일들이 나의 주 담당업무였기 때문에, 언제나 크고 작은 잡음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대학교 학사 업무라는 것이 매년 일정하게 반복되는 것이다 보니, 그렇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시기에 맞춰 공문이 내려오면 늘 하던 대로 휴학, 복학, 자퇴, 제적, 재입학, 졸업, 장학생 선발이나 지급을 처리하면 되었다.


내가 맡은 일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것은 '휴복학' 관련 업무였다. 99퍼센트의 학생들이 규정에 맞게 휴학하고, 복학하는 동안 나는 나머지 1퍼센트의 학생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은 휴학이 없는데 휴학을 더 쓰겠다고 우기는 학생, 복학을 해야 하는 데 복학을 하지 않는 학생들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었다.


예술활동을 하거나 여행을 하다가 날짜를 잊어버리는 건 해프닝에 가까웠다. 반수를 하거나, 진로에 대한 다른 뜻이 생겨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근본적인 이유도 있었고, 창업이나 알바를 통해 돈을 버느라 당장 복학할 수 없다는 학생들도 많았다. 그들의 절실한 사유에 대해서 공감은 할 수 있었지만 내가 심사를 하는 위치에 있지는 않았으므로,


"더 이상 남은 휴학은 없습니다. 복학하지 않으면 제적됩니다."


받아들이든 말든 그렇게 설명할 뿐이었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에게 전화 오는 경우는 늘 상황이 복잡해졌다. 어느 날은 한 남학생의 여동생이라는 사람에게 전화가 왔는데,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다. 집에 무슨 제적예정통지서가 왔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기에, 잔여 휴학기간이 없는데 복학신청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설명했더니 별안간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 새끼가 지금 깜빵에 있는데 어쩌라는 건데요!"


네 오빠가 잡혀간 게 그럼 내 잘못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으나, 오죽하면 이럴까 싶어서 나름대로의 속도로 타이른 적이 있다.


복학신청을 하지 않은 학생의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적도 있었다.


"경황이 없어 연락을 못 드렸는데, 000이 지난여름 바다에서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친구 부모님께서 제적예정통지서가 왔다고 말씀하시기에 연락을 드렸는데요, 이제 어떻게 진행하면 되나요?"


그때 알게 된 사실인데, 내가 일하던 학교에서는 학생 사망 시 관련 서류를 제출하도록 해서 사망을 증빙한 뒤 학생을 제적처리하고 있었다. 확인된 내용을 바탕으로 설명을 했고 절차대로 진행이 되어서 실제로 업무는  별일 없이 종료가 되었는데, 팀장님은 나를 따로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거 나도 몰랐던 건데, 생각해 보니까 좀 너무하지 않아? 학생이 죽었다고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닌 건 아닌데, 왜 죽었다고 제적처리를 하지? 2학년이면 2학년 수료. 3학년이면 3학년 수료. 이런 식으로 학적 상태만 바꿔놔도 될 텐데. 좀 이상하다. 어떻게 생각해?"


어찌 됐든 일이 처리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나와는 다르게 팀장님은 더 본질적인 의문을 품고 계셨다. 이후 상급 회의에서 해당 내용을 건의했다는데, 오래된 관행이라 바꿀 수는 없었다는 말도 뒤늦게 덧붙이셨다. 나는 왜 저런 생각을 못했을까, 무슨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는가. 괜히 자책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내가 가장 잊을 수 없었던 전화도 휴복학과 관련된 일이었다.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제적예정통지서를 받았다는 얘기였다. 살펴보니 어떤 2학년 남학생의 어머님이었는데, 그 학생은 군휴학 후 별다른 사유 없이 복학신청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제적대신 일반 휴학으로 임의 처리해 준 기록이 전산에 남아있었다. 더 이상 남은 휴학도 없어서 이제는 정말 복학하지 않으면 제적처리 될 위기였다.


"어머님, 그러니까 이번에는 복학을 꼭 해주셔야 제적을 면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나요?"

"혹시 아프신 거면 질병휴학을 추가로 사용하실 수 있고, 창업 중이시면 창업휴학이라는 것도 있고요, 육아휴학 같은 것도 있는데 해당이 되실지..."


어머님은 한동안 말이 없으시다가, 어렵게 입을 떼셨다.


"무슨 병이 있는 건 아닌데, 사실 우리 아들이 군대에서 머리를 다쳐서 말이랑 생각이 어눌해졌어요. 사회생활이 어려운 상태인데 몇 년째 회복이 안 돼서... 이건 질병은 아닌 거죠?"

"상급종합병원에서 발급된 진단서로 판단을 하고 있는데요, 비슷하게라도 내용에 대해서 증빙이 될까요?"


어머님은 무슨 병명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진단서로 증빙은 어려울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치료가 필요한 어떤 질병이 아니라, 부상으로 인한 영구적인 뇌손상에 가까운 듯했다. 학원도 안 보냈는데 저 혼자서 공부해서 서울의 10위권 대학에 들어간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고. 사고를 당해 사회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어눌해졌다는 사실이 참담하다는 말씀이 한탄처럼 이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어설픈 위로의 말을 내뱉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조금 아득했던 건, 이제 곧 진짜로 제적처리가 될 테고 제적통지서를 이 집에 다시 발송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직접 인쇄하고 포장해서 발송하는 거였다. 미리 기억해서 이 학생 집만큼은 빼고 보내고 싶었지만, 발송 내역도 등기 영수증도 모두 공문으로 보고를 올려야 했다. 한 번 더 마음이 아프실까 봐. 그게 좀 걸렸다. 그러나 나에게는 언제나 권한이랄 게 없었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어머님. 다음 달에 제적이 되면, 제적통지서가 발송이 될 겁니다. 모든 학생에게 동일하게 진행하는 절차이다 보니 지금 설명을 드렸더라도 우편은 발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저희 학교는 제적이 되더라도 재입학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의사만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학교를 다니실 수가 있거든요. 티오가 있어야 들어오실 수 있긴 한데, 거의 매년 티오가 있고요. 복학이랑 다른 건 입학금 한 번 더 내시는 거. 사실상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나중에 몸이 회복되시면 꼭 연락 주세요."  

"아, 그런 게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한동안 울적했다. 이어서 연달아 ‘진상’으로 분류될 만한 전화들이 걸려왔지만 오히려 그런 아웅다웅이 감사할 지경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함께하는 것보다, 미워할만한 사람들과 언성을 높이는 게 더 나았다. 대학교에서 퇴사할 때까지 그랬고, 지금의 직장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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