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골자리 성운을 바라보면은
'언젠가 유진목 시인이 말했다. 젊다는 건 내게 허리와 목과 무릎이 있다는 걸 잊고 사는 거라고."
- 이슬아,『끝내주는 인생』, 163쪽
어딘가 다치면 알게 된다. 나에게 그러한 신체부위가 있었다는 것을.
언젠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넷째 발가락을 다쳤을 때. 그제야 그 존재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나에게 네 번째 발가락이라는 게 있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막상 다치고보니 걸을 때마다 거슬렸다. '너도 내 무게를 어느 정도 감당하고 있었구나.' 넷째 발가락에게 무심했던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됐던 기억.
종이에 손가락만 한 번 베어도 한동안 불편하다. 옷을 입을 때, 씻을 때, 무얼 집을 때, 밥 먹을 때. 손가락이 관여하지 않는 일이 없다. '젊다는 건 내게 허리와 목과 무릎이 있다는 걸 잊고 사는 거'라는 유진목 시인의 말이 정말 탁월하다. 반대로 늙는다는 것은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나의 신체부위 이곳저곳의 존재를 실감하는 일이리라.
우리는 늘 순조로운 상태를 기본이라 생각하기에. 여전한 상태보다는 불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존재 같다.
대학교 교학팀에서 일하던 당시, 한심한 문의 전화를 정말 많이 받았다. 졸업학점 계산을 할 줄 모른다든가, 휴학 신청 문의를 엄마에게 부탁한다든가, 단순한 교칙을 반대로 이해하고 떼를 쓴다든가 하는 일들이 많았다. 나름 명문대 학생들이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한숨을 쉰 적이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멀쩡한 사람은 나에게 도달할 일이 없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99퍼센트의 학생들이 야무지게 학교생활을 해 나가고 있고, 나는 늘 0.1퍼센트의 어리숙한 학생들을 상대하고 있는 거였다. 콜센터든, 대학교 사무실이든, 직장이든 소수의 빌런에 쉽게 절망하는 사람과 의연한 사람은 그 사실을 떠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갈리는 것 같았다.
순조로운 것이 기본이라 생각하는 우리들은, 아파야 실감한다. 거슬려야 인지한다. 부정적인 사건들이 수도 없이 벌어지고. 그 일들은 저도 모르게 카운팅이 된다. 나도 예외는 아니라서 책상으로, 모니터로 시야가 나도 모르게 좁아지게 될 때면 어쩔 도리없이 분노하는 사람이 된다. 우울하고 답답해진다.
제임스웹 망원경으로 찍은 용골자리 성운 사진을 좋아한다. 너무 좋아한 나머지 휴대폰 배경화면도, 워치 화면도, 맥북 화면도, 태블릿 화면도, 사무실 PC 바탕화면도 온통 용골자리 성운 사진으로 해놓았다. 벌써 1년이 넘었고,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은 바꿀 일이 없을 것 같다.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때로는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이다. 그런 상상이 된다. 모니터에서 책상으로, 책상에서 건물로. 구글 지도에 손가락을 놓고 오므린 것처럼 서울에서 대한민국으로 대륙으로 지구로... 시야가 자꾸만 자꾸만 넓어진다. 그렇게 막막한 우주에까지 내 몸이 미치면. 아웅다웅에서 조금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아프고 거슬려서 실감하게 되는 부정적인 것들에서 잠깐이나마 해방되는 기분이 든다.
오늘같이 유독 제정신인 날은 보이지 않는 순조로운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다. 아프지 않은 몸 이곳저곳과, 큰 빚이 없는 재무상태와, 무탈한 가족과, 다툼 없는 우정과, 인자한 직장상사들에 대해서. 지연 없이 도착한 출퇴근 지하철과, 망가지지 않은 모든 전자제품과, 용량이 넉넉히 남은 화장품에 대해서.
퇴근 후에 카페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도 감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