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잊어야 한다는 착각

- 이별이 힘든 당신에게

by 서댐




이별의 아픔은 거의 추억에서 온다.


「이터널 션샤인」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에 관한 아주 유명한 영화. 나는 이 영화를 다섯 번 정도 보았는데, 아마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해서 볼 것이다.

어느 날, 기억을 지워준다는 업체로부터 '헤어진 연인이 당신의 기억을 지웠다’는 편지를 받고 그 자신도 연인의 기억을 지워버린다는 이야기.

이는 이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


이별에 대한 아픔을 현미경으로 분석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이별의)아픔에도 어떤 성분이 있다면, 거의 대부분은 추억일 것이다. 대행업체가 있다면 의뢰를 한번 요청하고도 싶다.


‘당신의 아픔은 63%의 좋은 추억과 24%의 외로움과 6%의 자괴감,
4%의 두려움, 3%의 불안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의 답변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 어설프게 낮잠을 잤다가 꿈을 꾸었다. 꿈에서(정말 오랜만에) 그녀를 잠깐 만나게 되었는데 카페에서 할 말 없이 서로 앉아만 있었다. 어색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그 속에서 정말 아무것도 못했다.


*


꿈에서 깨고, 나는 너를 잠깐 그리워했다. 그리고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너랑 다시 만나면 어떨까, 뭐 그런 게 아니라, 만나면 어떻게 될까, 연애가 어떻고 어떤 어려움이 있을 것이며 좋은 점은 무엇일까, 마음은 예전 같아질 수 있을까, 등등 그런 복잡한 계산이 아니라 그냥 지극히 단순한 마음이었다.

너랑 그냥 얘기를 참 오랜만에 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 와서 너랑 했던 얘기는 별로 기억도 나지 않는데 우스운 일이었다. 이제 너의 말투도 헷갈리는데, 그냥 하염없이 너랑 수다를 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시덥잖은 주제로 서로 가벼운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있었던 일들을 서로 담담하게 풀어내고, 무심결에 떠올린 소설의 줄거리를 너에게 설명하기도 했던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을 다시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그 달달한 기억들을 너에게 막 설명하고도 싶었다.

성신여대에서 데이트를 마치고 너를 버스 태워 보내려던 횡단보도에서, 우리는 서로 안고 있느라고 신호를 몇 번이나 흘려보냈었지. 너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신호등은 보지도 않고, 세 번이나 바뀌는 그 신호등을 보고도 나는 신호등이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면서 너를 그대로 안고 있었지. 나에겐 참 소중한 기억이지. 그런 건 셀 수도 없이 많아. 코 안골았다고 했었는데, 코도 자주 골았어

나는 종종 너를 침대에 눕혀놓고 얼굴에다 무차별적인 키스를 했었는데, 헤어지고 난 뒤에는 신기하게 입술의 감촉은 기억도 나지 않고, 내가 너의 광대뼈와, 눈두덩이와, 이마에 입을 맞출 때 어색하게 찌그러지던 내 입술의 뭉개지는 각도만 생각이 나더라.


이런 말들. 그리고 넌 별 애교 없이도 참 귀여운 사람이었다는 말. 그냥 그런 말들을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



이별이 아픈 건, 지워지지 않는 기억 때문일 것이다. 기억이란 건 일종의 정신적인 문신과도 같아서 점차 흐려지는 것이지 결코 한 번에 씻은 듯이 사라지지 않는다. 특별한 시술을 받지 않고서는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거의 반평생동안 그 형태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지되는 문신처럼, 기억도 별 대책 없이 지워지지 않는다.


지워지지 않는 문신을 보면서 매일매일 비누로 문지르며 확인하는 사람처럼, 이별한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지워야할 기억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그런 행위는 결국 기억을 복습하는 것이 될 뿐 결코 망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많은 것들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벌어지는 것 같다. 기억은 잊는 게 아니라 잊혀지는 피동의 과정이다. 그걸 자꾸 능동으로 해내려 할 때 상처는 수습할 수 없게 벌어다. 연애의 과정 속에서 늘 행복해야한다는 마음이 강할수록 더 불행해지고, 영원한 우정이라고 생각할 때 관계는 틀어지고, 일을 하면서 즐겁고 싶을수록 일에 대한 회의감은 늘어난다.


그냥 '일은 원래 힘든 것이지. 연애는 늘 즐거울 수 없지. 가까울수록 조심하는 게 당연하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문제가 조금 가벼워지는 것처럼 이별을 대하는 태도도 이와 같으면 참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한참 해봤다.[물론, 어렵지만.]


기억을 강제로 지우려는 것처럼 허무맹랑한 일도 없거니와, 그녀와 안고 있던 그 횡단보도 앞이라든지 뭉개지던 내 입술의 각도를.


그 아름다운 기억을 왜 잊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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