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영원함을 견딜 수 없다.

- '영원히'를 발음하며.

by 서댐
영원을 약속해본 사람들에게.


사랑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것을 인식하기는 어렵다. 그렇다.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사실은 사랑 비슷한 것들만 많다.


그래서 사랑은 신과 비슷하기도 하다. 사랑과 신은 모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저 있다고 믿어야 하며, 그것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은 아주 달라진다. 사랑과 신을 경험‘한’ 사람들은 많지만, ‘늘’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으며 있다고 해도 믿기 힘들다.


그렇다면 나는 사랑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아마도 그렇다.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짝꿍과, 대학교 때의 동기와, 그 이후 몇 번의 연애동안 만났던 여자들로부터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경험했다. 하지만 내가 경험했다고 느끼는 그 사랑이 과연 절대적 의미의 사랑인지, 그저 사랑을 가장한 착각인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사랑은 조건 없는 헌신과, 수용과 인정이며, 성적인 결합이며, 두터운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우정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나는 그런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때까지 느껴왔던 사랑의 감정은 일종의 소유욕이라든가, 욕구의 해소라든가 사회적 안정감을 충족하기 위한 ‘거래’에 가깝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것들을 충족하지 못했을 때 전혀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내가 사랑하려고 하는 대상은 예뻐야 했고, 유머감각이 있어야 했고, 내가 갖지 못하는 어떠한 신비한 매력을 가져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예쁘지 않고, 유머감각이 없으며,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하는 신비한 매력이 없을 때 그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나에게 '사랑'이 상대방을 소유해서 내 만족감을 채우려 했다는 '수단'에 불과했다는 '증명'이 아닐까.


나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사랑해본 바 없이 단지 내가 기쁘기 위해 사랑하고, 연애한 것은 아닌가. 내가 그녀들에게 잘해주었던 이유는 내가 그들을 진정 사랑해서가 아니라, 앞으로도 ‘사랑의 상대자’를 통해 무엇인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그래서 내 스트레스의 총량이 그에게서 느껴지는 만족감을 초과할 때, 일종의 ‘만족의 적자상태’가 될 때. 결국 이별하고 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이런 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서로에게 안정감을 제공하고, 섹스를 교환하고, 문화 생활을 즐기기 위한 파트너로써 존재하는 이런 역할 놀이가 사랑으로 격상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걸까. 나아가서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이러한 물음 속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무의미한 노력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고, 이기적인 유전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연애와 사랑이 비논리적인 감정의 교환이자, 논리적인 만족감의 교환행위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원인은 명쾌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두 사람이 결합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서로에게 충족되는 만족감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만족감은 항상 스트레스보다 높은 흑자 상태로 존재해야하며, 그것이 적자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둘 중 하나, 혹은 둘 모두가 사랑을 통해 불행해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사랑에게 속고, 사랑에게 상처받고, 사랑에게 실망하는 이유는 결국 사랑에 포함된다고 믿는 ‘영원’ 때문이라고.


사람은 ‘영원히’라는 말을 견딜 수 없다. ‘영원히’는 인간에게 적용될 수 없는 말이다. ‘영원히’존재할 수 없는 존재의 ‘영원’이라는 말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이 단지 죽음이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 ‘영원’ 때문이다. 영원한 무의식이 주는 그 막연하고 끝없는 두려움이 우리에게 숨막힐 듯한 공포를 준다.


사실 영원한 죽음만큼이나 영원한 삶도 무섭다. 천년에 천년을 곱하고, 1억년에 1억년을 곱해도, 1000조년에 1000조년을 곱한 만큼 시간이 지나도 죽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영원히 살아야한다면 영원한 삶도 얼마나 무서운가. 그 걷잡을 수 없는 권태를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1000조년을 산 자가 과연 감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사랑이라든가, 우정이라든가, 분노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지독한 권태 속에 잠식되어버린 인간성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인간은 유한한 삶 속에서 가치를 저울질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영원한 것과 결합하는 순간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종교적 믿음은 늘 흔들리고, 사랑은 실패하게 된다. 영원을 맹세하는 순간 우정에게 실망한다.


그래서 나는 ‘영원’이라는 말 앞에서, 내가 그간 해왔던 사랑을 반성하는 한편, 앞으로 어떤 자세로 삶을 대해야 할 것인지 고민한다. 낭만을 부정하는 것은 늘 찝찝한 일이지만, 낭만을 포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모호함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한다. 막연하게 사랑을 믿고, 사랑에 기대서 숨어버리면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 모든 기로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해야하는 우리의 삶을 보다 적극적으로 살아내야 한다고 다짐하는 셈이다.


글을 마치며,


앞으로는 영원을 약속하는 사랑이 아니라, 영원을 부정하는 사랑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원하지 못한 존재이고, 우리의 감정은 영원하지 않을 수 있으니 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영원하지 못할 수 있는 우리의 관계를 인정하고 순간을 더 음미하고 즐겨야 한다고.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하지 말고, 막연한 미래로 유예하지 말고 내가 가장 늙어있는 오늘 사랑하자고.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버렸을 때 덜 후회할 수 있게 하자고.


그런 사랑을 하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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