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Nov 17. 2017

검은색 라면

- 9살의 형이 처음 끓여준,

검은색 라면을 먹어본 사람이 있는지 묻고싶다.

이 글은 검은색 라면의 레시피를 소개하는 이야기다.


어머니는 보험회사에 다니셨고, 아버지는 동대문에서 장사를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일학년쯤의 일이다. 형과는 두 살 차이가 났지만 내가 학교를 한 해 일찍 들어가는 바람에 학년으로는 하나 차이가 났었다.

  

어머니가 퇴근하신 후에 형과 나는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학원도 다니지 않았으니 그냥 놀았다. 맨날 놀았다. 학교 다녀오면 친구 집에서 레고를 맞추거나, 동네를 쏘다니거나, 미니카를 슝슝 도로위에 올려놓고 달리곤 했다. 혼자 있는 것도 아주 좋아하는 아이였어서,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공상을 하거나 TV를 보기만 해도 하루는 손쉽게 지나갔다.     


그날은 웬일인지 어머니가 오시지 않았다. 나중에 아버지와 같이 들어오신 걸 보면 아마도 아버지 장사를 거드느라고 시장에 다녀오신 것 같다.

어머니는 기약 없이 오시지 않고, 나는 형과 집에서 TV를 보면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배가 너무 고팠다.      


형아. 배고프다.
나도.


그런 대화를 했던 것 같다. 곧 오시겠지 하던 어머니는 아홉시가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배는 점점 더 고파오고, 내가 자꾸 칭얼대자 형은 결심이라도 한 듯 나를 보며 물었다.     


라면 끓여먹을까?
형 라면 끓일 수 있어?

보통 라면을 처음 끓여먹는 나이가 몇 살인지 나는 잘 모른다. 내가 내 힘으로 라면을 끓여본 것은 아마 초등학교 4학년 아니면 5학년이었을 거다. 다른 사람들이 몇 살 때 라면을 처음 끓여보는지 난 잘 모르지만, 우리 형이 언제였는지는 잘 안다. 바로 그날이었으니까.     


엄마가 끓이는 걸 몇 번 봤다는 형은 호기롭게 냄비에 물을 올려가지고 가스레인지의 불을 당겼다. 물을 얼마나 넣어야하는지도 몰라서, 우리는 라면 뒤에 있는 설명서를 한참이나 읽어보기도 했다. 결국 형의 느낌대로 넣었지만.      


형의 라면 레시피는 이러했다. 물을 팔팔 끓인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면을 넣는다. 그리고 면 위에 수프를 붓는다. 그리고 가만히 내버려둔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뒀다. 그게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의 레시피였다.


물은 끓었고, 면은 그 위에 둥둥 떠있었고, 수프는 면 위에 안전하게 올려진 채로 온도를 받아냈다. 젓가락으로 한번만 휘저었다면 그래도 그럴듯한 라면이 되었을텐데, 수프는 면 위에서 새까맣게 타버렸다. 물도 졸았다. 잠시 후 면 위에 올려진 스프가 까맣게 탄 채로 면이 물에서 익자 불을 껐다. 무언가 이상했지만 형은 나를 안심시켰다. 뜨거운 냄비를 상으로 옮기는 것도, 대단한 모험이었는데, 형은 씩씩하게 장갑과 행주 같은 것으로 라면을 안전히 옮겼다.


뒤늦게 젓가락을 가지고 그 검게 탄 수프가 배인 면을 물과 휘휘 저었고, 국물엔 검은 물이 들었다. 검은 국물 라면. 독창적인 요리가 완성된 거였다. 면의 일부에는 스프가 타서 검은색으로 엉겨 붙어 있었다. 냄새가 끝장났다. 우리는 후후 불면서 그 검은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형은 의젓하게 나를 먼저 챙겨주었는데 그 맛은...


그 맛은...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짭짤하고 고소한 그 맛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색깔은 검은색이었으나, 맛은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그 맛과 비슷했다. 더 짰는데, 정말 맛있었다. 내 인생 최고의 라면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라면 하나를 둘이서 순식간에 나눠먹고 뿌듯하게 부모님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이 들어오셨다. 우리는 다먹은 라면 냄비를 부모님께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머니는 라면 끓이는 법을 어디서 배웠냐며 놀라셨다. 크게 걱정을 하거나 혼을 내지는 않으시고, 귀엽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셨다. 나는 형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리고 형은 아주 씩씩하게 형 노릇을 한 기분으로 뿌듯함을 만끽했다.                    


가끔 형과 술 한 잔을 할 때. 나는 그때 얘기를 종종 한다. 형은 전혀 기억 못하더라.

나는 과거를 그리워는 해도,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잘 안하는 편인데.      


그날로는 한번쯤 꼭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의 귀여운 남자아이 두명을 생각하면 흐뭇한 미소가 감출 수 없이 얼굴에 가득가득 퍼진다. 한 밤에 출출해서 라면이나 끓여먹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올랐다. 글을 쓰는 동안 시간은 더 늦어져서 그냥 자야할 것 같다.      

-

아, 그리고 내일은 형에게 전화를 한번 해봐야겠다. 라면 좀 끓여줄 수 있냐고 엉뚱한 질문을 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에게도 그림자가 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