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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Nov 29. 2017

경계를 구분하는 건 너무 어려워

- 1초가 경계가 될 때

          

나는 항상 경계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 세상이 흑과 백, 좋음과 나쁨, 옳고 그름으로 딱 갈라져있다면야 속편할 텐데 그렇게 명확한 경우는 별로 없다. 좋은 약에도 부작용이 있고, 사람들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기준이라는 잣대를 세우는 일은 참 힘들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고민하다보면 두손을 들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가령 '흰색은 언제부터 회색이 되지?' '회색은 언제부터 검은색이 되지?' 뭐 그런 고민부터 시작한다. 아주 흰 종이가 있다. 아주 미세하게 명도를 낮춘다. 아주 미세하게. 그럼 언제부터가 회색일까.

회색을 찾았다 치자. 그럼 '자. 이제 회색이다!' 하는 그 지점에서 아주 약간만 밝기를 높인다. 그럼 그건 회색일까? 흰색일까? 그 경계가 어렵다.     


회색 종이를 아주 조금씩 밝게 했을 때. '그럼 언제부터가 흰색인거냐?' 라고 물어도 그렇다. 조금도 어둡지 않은 완전무결한 흰색만이 흰색일까. 우리는 그런 완전무결한 흰색만을 흰색이라고 부르나. 아주 약간 색이 바랜 교실 벽을 회색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던가.     


사실 색에 대한 고민은 금방 집어치울 수 있다. 하지만 흡연이라든지 임신중절 같이 윤리와 결부된 문제에서는 더 어려워진다.


청소년의 흡연은 나쁜가? 그럼 성인의 흡연은 착한가? 흡연이 불법적이고 나쁜거라면 모두가 하지 말아야지 언제부터는 되고 언제부터는 안 되면 되나.

법적으로 청소년의 흡연 자체가 위법은 아니다. 판매가 불법일 뿐이지. 그리고 흡연 자체에 옳고 그름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 통념상 청소년의 흡연은 나쁘다. 라고 규정하는 사람이 많다. 일상 생활에서 그런 사람들의 의견을 듣게 되면(고등학생이 싸가지 없이 담배를 핀다든가, 질나쁜 놈으로 규정한다든가, 욕을하며 꾸중을 했다는 등의)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늘 난감하다. '흡연이 나쁜건가요?' 라고 묻고싶다. 폭행이 나쁘면 그게 어리든, 늙었든 나쁜 것처럼 애초에 흡연이 나쁜 거라면 누구도 해서는 안 되는 거다.

(나는 담배를 피지 않는다.)


흡연이 도덕적이냐 도덕적이지 않냐를 떠나서, 그 경계가 나는 어렵다. 법적으로 20세가 넘은 성인만이 담배를 살 수 있는데, 20세가 되기 1초전의 사람과 1초 후의 사람은 뭐가 그리 다르냔 말이다. 성인이 되기 두 시간 전의 사람과 두 시간 후의 사람은 얼마나 달라지나. 그런데 그 1초 사이에 위법과 합법이 갈린다는 게, 사회를 움직이는 규칙이라는 점에서 어쩔수가 없지만 좀처럼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래. 담배도 차라리 낫다. 임신중절같은 경우에는 더하다. 우리나라 모자보건법에 따르면 임신한지 24주 이내의 태아는 별도의 규정에 의거 예외적으로 이른바 낙태가 허용된다. 그 24주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23주의 태아와 25주의 태아는 생명과 죽음만큼의 거리에 있는 존재인걸까. 24주를 하루 남긴 태아와 24주를 하루 넘긴 태아는 생명과 죽음만큼의 어마어마한 거리로 떨어져 있는 걸까. 24주를 10초 남긴 태아와 10초 지난 태아에게. 그 10초에 삶과 죽음의 거리가 있는 걸까. 1초 전 후의 경우는 어떤가.  


속 편하게 안 되면 절대 안 되고, 되면 무조건 되게 하라. 라고 말할 수는 없다. 복잡한 사회에서 모든 일은 그렇게 단순하게 처리되지 않는다. 그렇게 처리해서도 안 된다.     


그런 기준을 나누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수많은 기준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 경계를 구분하고 고민하는 삶이 가끔 힘들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나름대로 답을 내릴 수 있을 때  마음이 참 편해지는 법인데 우리의 삶속에서 그렇게 뚜렷한게 많지 않다는 건 슬픈 일이다.     


나는 GOP 경계 근무병이었다. 군대에서는 경계가 아주 명확했다. 적군과 아군의 경계가 조금의 의혹도 남기지 않는 분명한 '선'이었다. 우리 부대와 주변 부대의 경계가 명확했고, 우리가 생활한 대대와 사회의 경계도 한 줄 철책으로 명확했다. 매일 매일 그 뚜렷한 경계를 넘어 다녔다. 문을 열고 잠그고, 경계를 바라보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아주 마음이 편했다.      


그때의 기억은 접어두고 아무튼,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경계를 고민하는 일은 참 힘들지만 우리는 주어진 삶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면서 평생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자꾸 구분짓고 나누려고 하면 힘들다. 그래서 인간에겐 이해와 공감, 납득이라는 힘이 있는 건가보다 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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