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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Dec 02. 2017

8살에게 사랑을 묻다

- 형준아 사랑은 뭐니?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타인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라고 정의했다. 누군가는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 하고, 사전에서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혹은 그런 일.’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나는 ‘타인을 자신의 존재보다 좋아하는 일’이라고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그래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때, 그 상대자를 위해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올 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면서 어설프게 남는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깊 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요일 목요일 저녁에만 가게되는 그 애매한 시간이 어떤 일에도 좀처럼 맞지 않아보여 난감했다.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도 있었으나 어찌어찌 과외를 하게 된 것이 올해의 마지막 달인 12월까지 계속되고 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일은 생각보다 깊은 책임감을 요한다. 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못 가르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말장난이 아니라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 잘 가르치는 것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못 가르치지 않는 건 혼자서 낑낑대면 그럭저럭 해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못 가르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어쩌면 아이들을 대하는 자세 같은 것에 가깝다.


책임감만큼 중요한 것은 인내심인데. 나도 모르게 미성숙한 아이들을 성인의 기준이나 상식선으로 바라보는 습관에서 벗어나야하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한 나 자신도 이렇게 미성숙할진대 내가 거쳐온 그 수많은 어리석음과 버릇없음, 게으름과 간사함이 아이들에게는 없어야한다는 마음은 그보다 더한 이기심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고3학생은 지문 속의 ‘예찬했다’라는 표현에서 ‘예찬’의 뜻을 나에게 물었다. 어떤 뜻일 것 같냐고 되물었더니, “예수님 찬양?” 하며 내 눈치를 살핀다. 농담이었다면 한바탕 웃음을 지었겠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허탈했다. 아무튼 아이들의 무지라든지 태도 같은 것들을 인정하고 늘 새로운 마음으로 알려주는 그 인내심이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형준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으므로 몇 배는 더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초등학교 1학년이 과외라니, 거의 모험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그 에너지와 산만함은 극복할 수 없는 벽 같았다.


하루하루 수업을 해나갈수록 생각은 빠르게 변화했다.

평생 아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이렇게 귀여운 줄 몰랐다. 그의 입에서는 천사의 말 같은 언어들이 쏟아져 내렸다. 보고 배운 것들을 진지하게 나에게 설명할 때나, 어설픈 거짓말을 진지하게 지어낼 때나, 자신의 치부를 조심스레 드러내는 아이에게 나는 완전히 무장해제 되었다.     


수업이 막 기다려졌다. 형준이의 입에서는 늘 공식을 벗어난 말들이 넘쳤다. 아주 똑똑하고 창의적인 아이기 때문에 그와의 대화는 내 삶의 어떤 활력소가 되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저한테 화를 막내는 거에요. 그래서 ‘반댓말’하고 싶었어요.”

“반댓말이 뭐야?”

“반댓말은 존댓말 반대로 하는 거예요. 야! 너! 이런 거.”


반말을 하고싶었나보다.


반댓말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때의 그 순수한 눈빛을 전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형준이와 수업을 할 때면 나는 자주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공부와 관련된 것일 때가 더 많지만 내 개인적인 궁금증도 적지 않다. 질문을 던지고 나면 아주 당연한 대답이거나, 상상할 수 없는 대답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 말들은 머릿속을 뻐근하게 할 정도로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형준아. 친구라는 건 뭘까?”     

“친구는 같이 노는 거예요.”

“안 놀면 친구가 아니야?”

“안 놀면 친구 아니에요.”     


그렇지. 친구는 노는 거지. 나도 친구들을 만나면 아직도 노니까. 아마 평생 친구와는 놀기만 할 테니까. 그렇구나.      

당연한 건데도 다시금 생각하 했다.

   

“친구를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선생님 좀 알려줘.”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있잖아요? 그러면은 다가가서. 누구야 우리 같이 놀래? 하면 돼요.”

“그러면 다 친구가 돼?”

“그게 안 되면 우리 집에 거북이 있는데 우리 집 가서 볼래? 하면 돼요.”     


나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를 떠올려보면서 내가 친구들을 만났던 방식이 다 같은 식이었던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우리 PC방 갈래? 끝나고 노래방 갈래? 강의 끝나고 술 마시러 갈 건데 같이 갈래? 같은 질문은 결국은 같이 놀자는 말이었다. 그리고 난 그렇게 매년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리고 얼마전 나는 여덟 살 형준이에게 사랑을 물었다. 형준이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손쉽다 못해 성의없이 느껴질 정도의 속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대답을 듣고, 전기에라도 감전된 사람처럼 숨을 잠깐 멈췄다. 그리고 8년 사이에 그가 어떤 사랑을 했는지 감히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때 맛볼 수 있는 자격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마음이 어린이라고, 노인이라고 다를 리 없는데도 나는 나도 모르게 젊은 성인들의 사랑을 완전하고 기본적이며 정상적인 형태라는 꽤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랑은 오래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느껴지는 것인데. 능동이 아니라 피동인 것을 잊고 살았다. 맞다. 사랑은 믿는 게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고. 다가가는 게 아니라 어느새 와있는 것이었다. 사랑은 민다고 밀리지도, 당긴다고 당겨지지도 않는 ‘무언가’였다.      


오늘도 형준이를 만나고 왔다. 모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잘 준비를 하면서 문득, 내 옆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살모사와 독개구리에 대해서 설명하는 그 얼굴을 떠올렸다. 이 아이의 가장 아름다운 한 시기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자라지 않았으면 하는 욕심은 너무 이기적이야. 마속으로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키보드가 눈에 들어왔고 형준이의 '사랑론'을 다시금 복기하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형준이의 말을 빌려 글을 마친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형준아. 사랑은 뭐야? 사랑은 뭘까?
사랑은 ‘안 좋은 거’에요


사랑이 ‘왜 안 좋은 거’야?
‘하기 싫은데도 자꾸 하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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