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서 내가 나에게 주는 황홀한 순간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나는 만년필을 나의 여행 기념품으로 삼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Sailor, 프랑스에서는 Recife,
이탈리아에서는 Montegrappa 만년필을 구매했다.
좋은 브랜드를 사고 싶었지만,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100유로 이하라는 나만의 기준을 세워 구매했다.
비싼 만년필을 사면 괜히 모셔두게 될까 봐,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가격대를 선택했다.
그 덕분에 갖고 싶은 만년필을 모두 갖지는 못했지만,
이 방식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만년필 브랜드는 독일의 몽블랑(Montblanc)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처음 알게 된 만년필 브랜드가 몽블랑이었고,
로고가 유독 마음에 들었다.
그저 ‘첫사랑’ 같은 존재다.
(몽블랑 만년필은 아직 갖지 못했지만,
30살 기념으로 몽블랑 지갑을 나에게 선물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만년필에 빠져 있었다.
그 이전에는 볼펜을, 더 이전에는 샤프를,
처음에는 연필을 사랑했다.
연필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초등학교 시절, 연필과 지우개는 가장 기본적인 필기구였다.
종이 노트에 꾹꾹 눌러가며 글씨를 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는 샤프가 다양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연필을 깎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샤프를 더 자주 썼다.
시간이 흐르고, 전자기기가 보급되면서
볼펜이 일상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하는 시대가 열리면서
볼펜은 더 간편한 도구가 되었고,
대학생활 동안 자연스럽게 볼펜이 주 필기구가 되었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가 완전히 자리 잡았지만,
나는 오히려 고전적인 만년필을 수고로이 꺼내어 쓰고 있다.
왜 나는 만년필로 정착했을까?
환경 변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첫 번째 이유는, 손에 닿는 사각거림이 좋기 때문이다.
나는 촉감에 민감한 편이다.
어릴 적 미술을 했던 경험도 있어서 그런지,
연필을 깎는 것조차 나에게는 노동이 아니라 하나의 힐링이었다.
연필심을 뾰족하게 깎아내고,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글씨를 쓰는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어쩌면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남는 ‘흔적’ 또한
나를 만족시켰던 것 같다.
그렇다면, 볼펜과 연필과는 다른 만년필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만년필은 세상에서 가장 번거로운 필기구다.
고가품으로 취급되며, 때로는 고상한 취미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바로 그 번거로움과 고상함,
그리고 고가품이라는 느낌이 좋아졌다.
만년필을 손에 쥐고 글씨를 써 내려갈 때,
손끝에 전해지는 사각거림과, 종이를 긁는 미세한 소리,
그 모든 감각이 나를 황홀하게 한다.
촉각, 청각, 시각이 모두 깨어나는 순간.
이런 명확한 자극은 나에게 큰 충족감을 준다.
변태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이다.
만년필로 사각사각 글씨를 써 내려가는 이 시간은
삶 속에서 내가 나에게 주는 가장 황홀한 경험 중 하나다.
이 번거로운 만년필을 사용할 때마다, 나는 황홀한 경험을 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만년필은
내가 나에게 애정과 시간을 쏟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해 준다.
앞으로 살아가며 번거로운 과정을 맞이할 때도,
마음을 다해 집중한다면 결과와 상관없이
그 과정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만년필은 내게 알려준다.
그래서 나는 만년필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