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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헌책방 <집현전> 서점 책 사냥기

【마지막 회】

by 책사냥꾼 유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中에서



가을날, 세 가지 즐거움을 찾아 떠나다


2025년 10월 18일, 주중에 자주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랜만에 가을다운 맑은 날씨가 찾아왔습니다. 찌뿌둥했던 마음도 활짝 개는 듯했죠. 알베르 카뮈가 "가을은 온갖 잎들이 예쁜 꽃을 피우는 제2의 봄이다"라고 했던가요? 오늘은 그 말처럼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문득, 조선시대 4대 문장가로 일컬어지는 신흠 선생의 『상촌집』에 담긴 세 가지 즐거움이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문을 닫고 마음에 맞는 책을 읽는 즐거움, 둘째는 문을 열고 마음에 맞는 벗을 맞이하는 즐거움, 셋째는 문을 나서서 마음에 맞는 풍경을 찾아가는 즐거움이었지요. 저는 이 세 가지 기쁨을 한꺼번에 누리고자 배다리 헌책방 '집현전'으로 향했습니다.



'집현전'에 스며든 시간과 이야기


'집현전'은 문 입구에 강렬한 빨간 글씨로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헌책방'이라는 광고 문구를 자랑스럽게 내걸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희끗한 사장님은 몇 년 전 교직에서 정년퇴임하신 뒤 2대 사장님으로 서점을 인수해 운영하고 계신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이곳 '집현전'은 다른 헌책방보다 공간이 다소 비좁지만, 나무 계단을 오르면 2층 책꽂이에도 책이 가득합니다.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2층에서 쿵, 쿵, 쿵 하는 주기적인 발소리가 들려왔어요. 사장님께서 책을 정리하고 계신가 보다, 짐작하며 조용히 1층 출입문 오른쪽부터 훑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공간은 협소해도 책 분류와 정리는 비교적 깔끔하게 되어 있었죠.






박인환 시인과의 우연한 만남


가장 먼저 눈에 띈 책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었습니다. 요즘 박인환 시인의 책을 모으고 시집과 평전을 꾸준히 읽고 있던 터라, 그 제목이 유난히 제 눈을 번쩍 뜨이게 했어요. 아마도 박인환 시인에 관한 책이 아닐까 하는 강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산삼을 찾기 위해 아무리 많은 사람이 산을 헤매도 산삼을 발견하는 임자가 따로 있듯이, 책과의 인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여러 번 다녀도 보이지 않던 책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나고,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어도 단 한 사람에게만 제 얼굴을 펼쳐 보이는 우연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책을 펼쳐 보니 제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책 제목 아래 부제처럼 '우리 시대의 마지막 순수와 절망. 최초의 진실을 가진 대책 없는 글쟁이들의 술, 눈물 그리고 인생 이야기'라고 쓰여 있더군요. 이 책은 총 58편으로 구성된 예술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문학 에세이였어요. 저자는 소설가이자 아마추어 바둑기사인 강홍규 작가님이었습니다.


이 책은 전체가 박인환 작가님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라는 소제목으로 된 부분에서만 박인환 작가님의 글을 다루고 있었지요. 이 글에는 1955년 출간된 그의 첫 시집 『박인환 선 시집』의 출판 관련 행사 에피소드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 <세월이 가면>의 흥미로운 창작 비화가 담겨 있었습니다.

더불어 천상병 시인과 같은 문단의 독특한 개성을 지닌 작가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과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들도 풍성하게 실려 있었습니다.



헌책방 1층에서 만나는 문학의 흔적


그 옆으로는 종교 서적, 특히 기독교 관련 책들이 모여 있었고, 그곳을 지나자 시집 코너가 나타났습니다. 지난해 이곳을 방문했을 때, 김종길 시인의 서재에서 옮겨온 듯한 시집들이 여러 권 눈에 띄었던 기억이 납니다. 책장을 넘기면 대개 '김종길 선생님 혜존'으로 시작하는 인사말이 적혀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김종길 시인의 제자들이나 문하생들이 스승님께 헌정한 시집들이 이곳까지 전해진 것이리라 짐작되었습니다. 당시 김종길 선생님의 이름이 보이는 시집들을 여러 권 샀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시집 코너 옆에는 2층으로 향하는 연한 미색 나무 계단이 있었습니다. 니스칠이 잘 되어 반질반질 윤이 났지요. 계단 왼쪽 벽면에는 6~70년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지금은 보기 드문 LP판 수백 장이 수북하게 꽂혀 있었습니다. 다음 방문에는 꼭 시간을 내어 자세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저도 어릴 적 전축이 있어 아버지께서 즐겨 들으시던 <회심곡>이나 조미미, 이미자 선생님의 레코드판, 그리고 누나들을 위해 사 오셨던 <엘리제를 위하여> 같은 피아노곡집을 들었던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2층, 고전과의 새로운 만남


옛 추억을 잠시 뒤로한 채 2층으로 올라섰습니다. 그곳에서 국문학 비평의 거장이신 김현 선생의 『행복한 책 읽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제 서재에도 1992년에 출간된 노랗게 바랜 초판본이 이미 있지만, 이곳의 책은 2007년에 간행된 23쇄본으로, 표지는 노란색에 내지는 하얗게 인쇄된 양질의 책이라 관심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이 책을 구매하여 다시 읽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기존의 초판본은 너무 낡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시구처럼 '한 천사가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면, 나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라고 읊조릴 정도로 바스러질 지경이었기에, 소중한 보존용으로 간직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옆 진열대에는 『백 년의 고독』이라는 제목의 책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표지에는 '읽기의 즐거움,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승화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라고 책이 소개되어 있었지요. 사실 집에는 2017년에 구입한 『백 년 동안의 고독』(하서출판사, 이가영 번역)이 있었는데, 아직 읽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발견한 책은 스페인 문학 전공자인 유왕무 교수의 『백 년의 고독』으로 『백 년 동안의 고독』이란 책에 대한 해설서 성격을 띠고 있어서 작품을 이해하기 좋은 징검다리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두 권의 책을 소장하는 것이 다소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해설서가 그동안 손대지 못했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시간을 품은 희귀본의 유혹


그 맞은편에는 <평민사>에서 나온 흰색 표지의 낡은 책이 보였어요. 제목은 『시학 평설』, 해밀턴 화이프 교수의 저서였습니다. 흰 표지에서 느껴지는 청결함과는 달리, 한 장을 넘기자 노랗게 바래 잘못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질 듯한 누런 속지가 드러났습니다. 맨 뒷장 판권지를 살펴보니, 1979년 6월 10일 초판본이었죠. 요즘 브런치에 희귀본 관련 연재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초판본에 관심이 많이 갑니다. 대학 시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은 바로 그 『시학』에 대한 해설서였습니다. 제목처럼 『시학』의 중심 내용인 모방설과 쾌락설을 예술의 본질로 삼고, 이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이 책의 저술 목적처럼 느껴졌어요. 얼른 손에 집어 들었습니다.



박경리 작가님과의 뒤늦은 인연


마지막으로 구입한 책은 박경리 작가님의 장편소설 『나비와 엉겅퀴』였습니다. 매우 낯선 제목이었지요. 그동안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로 유명하신 박경리 선생님은 한국인이라면 꼭 읽어야 할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번번이 인연이 비껴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낡은 박경리 선생님의 책을 보자마자 얼른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이 책은 세로 쓰기로 되어 있었고, 역시 판권지를 살펴보니 1978년 초판본이 나온 한 달 후인 1979년 1월 중판본이었습니다.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니 2004년에 이 책이 1, 2권으로 나뉘어 '자음과 모음' 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였습니다. 1978년 초판본과 1979년 중판본도 시중에서 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죠. 망설일 틈 없이 이 책을 구매했습니다. 책 내용이 궁금하여 알라딘 서점에 안내된 책 소개를 보니, '죽거나 미치지 않고는 삶과 사랑을 견딜 수 없었던 여자들의 이야기'라고 강력하게 소개되어 있더군요. 흥미로운 생각이 들어 얼른 손에 들고 구매를 결정했습니다.



<에필로그>


배다리 헌책방 '집현전'에서 시작된 저의 '책 사냥기'가 벌써 12화를 맞이하며 막을 내리네요. 마치 보물 찾기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낡은 책들을 뒤적이며 발견의 기쁨을 누렸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이 작은 공간 속에서 수많은 작가들과 문학 작품들을 만나고, 때로는 잊고 있던 추억의 조각들을 발견하며 위안과 행복을 얻기도 했습니다. 책 사냥은 단순히 책을 사는 행위를 넘어, 삶의 깊이를 더하고 새로운 지혜를 얻는 여정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물론, 이것이 끝은 아닐 거예요. '책 사냥'은 저에게 평생 계속될 아름다운 취미이자 소중한 인연의 연속일 테니까요. 언젠가 다시 배다리 헌책방의 문을 열고 새로운 보물을 찾아 나설 제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구독자 여러분께서도 헌책방에서 우연히 만나는 책 한 권이 선사하는 특별한 순간을 자주 경험하시기를 바라며, 긴 여정의 끝자락에서 따뜻한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유은 책사냥 2탄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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