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 서점, 그 특별한 공간의 책 이야기
"책꽂이에 꽉 차 있는 다른 많은 책들도 각각 사연을 가지고 있다. 한 권을 뽑아 들면 그것을 사기 위해서 투쟁하다시피 했던 일이며 사고 나서 기고만장했던 일이 생생하게 회고된다.
그 당시에 돈은 나에 게 책을 사기 위해서나필요했을 뿐 다른 아무것도, 즉 내가 생각하고 싶은 그 어느 것도 의미하지 않았다. 내가 열렬히 필요로 하던 책 이 있었고 나에게는 그 책이 신체적 양생보다도 더 필요했다."
-조지 기싱, 『헨리 라이크로프트의 내밀한 기록』
한미 서점에서 책 사냥을 마친 뒤, 저는 이끌리듯 바로 옆 아벨 서점으로 향했습니다. 다른 헌책방과 달리 이곳은 특별한 분위기로 저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유리문 위의 ‘배다리 (작은 책-詩가 있는) 길’ 서각 작품과 빼곡히 붙은 안내문들은 아벨 서점의 깊은 문화적 가치를 드러냈습니다. 화도진 도서관 공고, 지역 문학가 모집, 시인 추모 글, 각종 문화 행사 포스터 등, 서점 문은 그야말로 배다리 문화의 축소판과 같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사장님께서 따뜻한 미소로 저를 맞아주셨습니다. 아벨 서점은 제가 대학생 시절인 1980년대 후반부터 인연을 맺어온 곳으로, 75세 곽현숙 대표님과 젊은 사장님 등 두 분이 운영하십니다. 이 서점은 수많은 헌책방이 사라지는 동안에도 1973년부터 굳건히 이 터를 지켜온 오랜 친구 같은 곳이죠.
대표님은 지난 18년간 매주 시 낭송회를 열고 소책자를 발간하며 책과 지역 문화에 대한 깊은 열정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분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실제로 詩 전문 서점이나 영어 전문 서점 등이 골목 안에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서점 왼쪽부터 찬찬히 탐색을 시작했습니다. 아벨 서점은 이전의 책방 공간과 달리, 대표님께서 직접 인테리어는 물론 2층 다락방까지 손수 꾸미셨다고 합니다. 망치질과 페인트칠을 마다하지 않으셨지만, 그럼에도 책을 손에 들었을 때 가장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시는 사장님의 열정이 공간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서재 왼편의 음식 서적 코너에서는 이미 책 사냥으로 배가 부른 제가 "배부른데...또 음식인가?" 하는 우스운 생각도 했지만, 그곳에는 음식 책 외에도 요즘 저의 관심사인 환경과 생태 관련 책들이 가득했습니다. 그중 이탈리아의 카사노바 회상록을 떠올리게 하는 『나무의 회상록』이라는 제목이 유독 제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끌리듯 집어 든 이 책은 나무가 화자로서 수억 년 전, 태초부터 자신이 바라본 세상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내용이었습니다.
과거 김훈 작가의 소설 『개』 를 박웅현 작가가 '개가 되어 쓴 것 같다'라고 극찬했듯이, 『나무의 회상록』을 쓴 ‘뀌도 미나 디 쏘스피로’ 작가는 마치 '나무되기'를 넘어, '나무가 된 작가'로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주어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이어 서점의 정면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곳은 주로 인문 고전 책들이 꽂혀 있는 코너입니다. 그동안 수없이 방문하여 대부분 익숙한 책들이 많이 보였지만, 오늘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책이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전에도 보았었지만 그동안 인연이 없었던 『재능』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나보코프의 대표작인 『롤리타』는 출간 당시 문학계와 교양인들 사회에 큰 충격을 주며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만들기도 했지요.
그런 그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영어 사전만큼이나 묵직한 『재능』을 손에 들었습니다.
다음의 책 표지 광고가 마음을 꽉 붙들어 세웁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풍요로운 기억과 상상이 가득한 미로 같은 유희의 작품,
온갖 러시아 문학의 뮤즈들이 등장하고 지적 유희가 돋보이는 체스 같은 소설”
이어서 평소 잘 찾지 않던 서점 안쪽의 미술 및 음악 코너로 들어섰습니다. 그곳에서 제 시선을 사로잡은 책은 바로 『멀티를 주는 남자』였습니다. 표지에 그려진 누드화는 엄격한 도덕 교육을 받은 저에게 다소 낯간지러웠지만, 신선한 제목에 이끌려 호기심에 책을 뽑아 들었습니다. 저자인 김진국 작가님은 과거 신문이나 잡지 등에 성 관련 에세이를 쓰시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이 책 또한 성과 사랑을 다루고 있었고, 중간중간 세계적인 화가들의 누드화가 삽입되어 있었습니다.
책을 집어 들면서도 '이 책을 어떻게 계산한단 말인가!' 하는 민망함이 스쳤습니다. 그러나 이내 '명화를 명화로 바라봐야지. 그렇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어색한 미소를 짓게 되는, 난감하면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다시 서점 거실로 나오자, 사장님께서 늘 인문 고전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소개하던 특별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빛바랜 을유문고, 박영문고, 삼성문화문고, 탐구당, 삼중당 문고 등 손바닥만 한 70, 80년대 문고판들이 빼곡히 모여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대표님이 손수 쓴, 요즘 젊은이와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따뜻한 메시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1970년대 ~80년대 문고본 중에는 세로 쓰기로 되어 있는 책도 있습니다. 옛글의 언어와 가까워질 수 있는 우리 안에 시간을 권하며 문고본 코너를 마련해 봤습니다. 손안에 드는 한 권의 책으로 잠재된 우리 안의 고전의 센서를 열어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 -아벨서점-
마지막으로 고른 책은 바로 백석 시인의 『백석의 맛』이었습니다.
백석은 시인들에게도 교과서와 같은 어쩌 면 스승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백석 시를 베끼기 위해 시를 써 왔다." -안도현
"나의 '시 스승'으로 먼저 백석 시인을 댄다." -신경림
표지에는 시에 담긴 음식, 음식에 담긴 마음이란 글귀도 인상적입니다. 이미 배가 불러 음식 생각이 없었는데도, 유독 음식에 관한 책이 계속 눈에 들어오네요. 백석 시인은 월북하여 한동안 금서 목록에 올랐지만, 우리말의 소소한 아름다움이 어디까지 다다를 수 있는지를 능숙한 필치로 다루는 시인으로 매우 유명합니다.
책을 들어 내용을 훑어보니, 저자 소래섭 님이 백석 시인의 모든 시가 '음식'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몇몇 시에도 음식이 등장하지요. 호기심이 발동하여 배는 부르지만 기꺼이 이 음식에 관한 시집을 골라봅니다. 『백석의 맛』 시집을 손에 들고 나오니 더더욱 마음까지 불러지는 느낌입니다. 오늘은 이만 책 사냥을 마쳐야겠습니다.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지성 - 나는 내 연장들을 거둔다. 밤이 되었고, 하루의 일은 끝났다.
나는 두더지처럼 내 집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지쳤거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피곤하지 않다. 하지만 날이 저물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