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서 마주한 차의 경전: 희귀본③
고등학교 시절, 우리 집 구석에는 겉장이 뜯겨 나간 채 굴러다니던 두툼한 헌책 한 권이 있었다. 나관중의 <삼국지>를 요약한 판본이었다. 당시 내 마음을 붙잡았던 의문은 주인공 유비가 노모를 위해 짚신과 돗자리를 팔아 정성껏 ‘차(茶)’를 구하려 애쓰던 대목이었다. 배를 채울 밥도 아닌, 그깟 찻잎 몇 줄기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간절했을까.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처럼 아무 물이나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차는 생존을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 프랑스의 와인이, 독일의 맥주가 탄생한 배경에는 결국 ‘맛있는 물’을 향한 갈망이 서려 있었던 셈이다. 생(生)의 근원인 물을 예술로 승화시킨 지혜, 그 정점에 바로 당나라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이 있다.
중국인들은 삶의 본질을 꿰뚫는 기록에 ‘경(經)’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민초들의 노래를 모아 <시경>이라 불렀고, 우주의 이치를 담아 <역경>이라 명명했듯이, 차를 다루는 기술과 정신에도 경전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이 귀한 고전을 운명처럼 마주한 것은 2018년 6월, 인천 배다리 골목의 아벨서점에서였다. 한참을 수소문하다 포기할 무렵, 낡은 서가 구석에서 마법처럼 이 책이 튀어나왔다. 잊혔던 기억이 선명한 실체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내가 만난 김명배 역의 <다경>은 1980년대 한국 사회가 전통의 뿌리를 찾으려 했던 거대한 몸짓의 결과물이다. 당시 태평양박물관(현 아모레퍼시픽)은 화장품 기업을 넘어 우리 차 문화를 복원하려던 선구적 기지였다. 어렵게 구한 <다예총서> 제1권 <동다송·다신전>은 이 기획의 웅장한 시작이었고, 제2권인 김명배본 <다경>은 그 정점을 찍는 역작이었다.
여기에 비슷한 시기 백양출판사에서 나온 이규정 선생의 <다경>까지 나란히 놓고 보니, 1982년 가을 한국 차 문화 연구에 불어닥친 열기가 손끝으로 전해진다. 단 5일 만에 인쇄와 발행이 이루어진 이 희귀본들은 이제 고서 시장에서도 자취를 감춘 채 시간의 깊이만을 더해가고 있다.
육우는 <다경>을 통해 기술을 넘어 ‘존재의 결’을 논한다. 그는 "차는 야생차가 상품이며, 재배된 차는 차등품이다"라고 단언한다. 이는 사람과 교육 또한 마찬가지다. 온실 속에서 매뉴얼대로 길러진 재능보다, 거친 비바람을 견디며 스스로 뿌리 내린 야성적 기개가 결국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는 통찰이다.
또한 그는 차의 진수가 오직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구결(口訣)’에 있음을 강조했다. 붓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장자의 수레깎는 노인이 말한 '전할 수 없는 기술'의 경지와 맞닿아 있다. 진실은 언제나 글자 밖, 체득의 영역에 있다는 고전의 겸허한 고백이다.
육우는 찻물이 끓는 찰나의 순간을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를 관찰하듯 세밀하게 묘사한다. 이른바 '삼비(三沸)'의 미학이다.
"물이 끓는 것(일비,一沸)은 고기눈과 같은 물방울이 생기고(어목,魚目) 어슴푸레한 물 끓는 소리(미성,微聲)가 나는 무렵을 첫째 끓음이라 한다. 솥의 가장자리에 솟아오른 샘물처럼 구슬이 이어진 것같이 물방울이 올라오는 것(용천연주,湧泉連珠)을 둘째 끓음(이비,二沸)이라 한다. 물결이 넘실거리고 북치는 소리가 나는 것(등파고, 騰波鼓)을 세째 끓음(삼비, 三沸)이라 한다. 그 이상 끓으면 물이 쇠잔하여 마실 수가 없다."
그 이상 끓으면 물의 생명력이 다해 '쇠잔해진다'는 육우의 경고는, 비단 차를 끓이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적절한 때를 알고 멈추는 것, 그것이 차가 주는 진정한 가르침이다.
육우가 꼽은 ‘아홉 가지 난점’은 이 에세이의 백미다. 차를 만드는 법부터 마시는 법까지, 어느 공정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그 아홉 고비는 우리네 삶이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과 정성의 순간들을 비추는 거울이다. 차를 만드는 법이 옳아도 물이 나쁘면 안 되고, 물이 좋아도 불이 약하면 헛일이듯, 인생의 모든 분야 역시 사소한 공정들의 완벽한 결합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육우는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차에는 아홉 가지의 난점이 있다. 첫째는 차를 만드는 법 이고, 둘째는 차의 품질을 감별하는 것이고, 세째는 차를 달이는 그릇이고, 네째는 차를 굽거나 달이는 불이고, 다섯째는 물을 선 별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떡차를 굽는 기술이고, 일곱째는 떡차를 가루내는 방법이고, 여덟째는 차를 달이는 방법이고, 아홉째는 차 를 마시는 방법이다."
먼지 앉은 고서들 속에서 나는 길을 잃기도 하고, 다시 찾기도 했다. 유비의 효심에서 육우의 고집으로, 그리고 80년대 한국 다도의 새벽으로 이어진 이 여정은 결국 내 안의 갈증을 달래는 과정이었다. 40년의 세월을 견딘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었지만, 오히려 세월이 더한 깊이가 느껴진다.
이제 책장을 덮고 찻물을 올린다. 물방울이 물고기 눈처럼 맺히는 '어목(魚目)'의 순간을 기다리며, 내 삶도 그렇게 투명하게 끓어오르길 기대해 본다. 천년의 지혜는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지금, 당신 앞에 놓인 찻잔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