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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뿔 이야기』에 담긴 민족의 뿌리와 언어의 숨결

희귀본 <쥐뿔 이야기>를 만나다

by 책사냥꾼 유은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라 는 말은 바로 '제 뿌리도 모르는 주제에' 라는 말입니다.

쥐에 무슨 뿔이 있겠습니까.


쥐뿔'은 '지뿔'에서, '지뿔'은 '지뿌리'에서, '지뿌리'는 '제뿌리'에서, '제뿌리'는 '자기의 뿌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여기서 뿌리라는 뜻은 조상이자 자신의 근본, 인간 원래의 본성, 우주의식, 하느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쥐뿔 이야기> 머리말 중에서







프롤로그: 시간의 강물 위에서 보물을 건지다


1. 먼지 쌓인 헌책방, 그 속에서 피어난 운명적인 인연

십여 년 전, 따스한 햇살 아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던 헌책방의 풍경. 익숙한 길을 걷던 책사냥꾼의 발걸음은 그날 특별한 이끌림을 느꼈습니다. 쌉쌀한 고서의 향기가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책더미 속에서 홀로 빛나던 분홍색 책등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마치 수십 년을 기다려왔다는 듯, 빛바랜 종이와 낡은 제본이 뿜어내는 고즈넉한 아우라에 발걸음을 멈추었을 테지요.


책의 제목은 『쥐뿔 이야기』. 해학적이면서도 심오한 지혜를 품고 있을 듯한 이름이 지적 갈증을 자극했습니다. 이 책과의 만남이 가슴 벅찼던 이유는, 『쥐뿔이야기』가 이미 절판되어 시중에서 자취를 감춘 진정한 의미의 희귀본, 말 그대로 시간이 감춰둔 보물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벅차오르는 설렘으로 펼친 책장 속, 유려하고 단정한 전서체 글자들과 '이제는 꼭 알아야 할 쥐뿔이야기'라는 제목은 오랜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암호처럼 느껴졌습니다. 책사냥꾼은 이미 평범하지 않은 지적 탐험의 초입에 들어섰음을 직감했습니다.


2. 고요한 표지 위, 우주의 심오함을 새긴 거장의 숨결


책의 표지 디자인은 깊고 신비로운 보라색 바탕으로, 광활한 우주와 하늘의 중심 궁궐인 자미원(紫微垣)을 연상시키는 색상입니다. 그 위에 전서체로 새겨진 천부경(天符經) 문구는 시대를 초월한 지혜의 정수를 담고 있는 듯 절묘하게 어우러졌습니다. 이는 이 책이 우주와 인간, 역사와 언어의 근원적 물음을 탐구하는 심오한 여정을 예고했습니다.


이 책을 지은 이는 국어학자이자 국문학자로, 훈민정음 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반재원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명한 학자로서의 권위와 깊이 있는 통찰을 오롯이 담고 있는 그 이름은, 이 책이 치열한 학문적 탐구의 산물임을 확신하게 했습니다. 책사냥꾼님은 고대 언어의 심연을 탐험하고 잃어버린 민족의 뿌리를 찾아가는 지적 여정에 설렘과 기대를 품고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저자의 간곡한 외침 : '머리말'을 꼭!


1. 책 한 권에 담긴 비장한 당부: '일러두기'가 전하는 메시지

책장을 넘기자마자, 내용에 앞서 저자의 <일러두기>가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꼭 <머리말>과 <후기>를 먼저 읽어 보신 후에 본문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이 특별한 요청은 단순한 독서 지침을 넘어, 심오함과 논쟁적 성격을 암시했습니다. 『환단고기』류의 서적을 접할 때 객관성을 유지해야 함을 알기에, 긴 머리말을 먼저 읽어달라는 요청은 진지한 성찰과 열린 마음으로 다가설 준비를 당부하는 무언의 호소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책사냥꾼님은 이 책이 거대한 사유와 대면하고 있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머리말을 읽어나갔습니다.


2. 잃어버린 뿌리에 대한 고뇌: 민족 정체성 회복의 간절함

긴 머리말 속에는 단군역사의 중요성과 사대주의 배격을 강조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민족의 뿌리와 조상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날카롭게 질문했습니다. 단군이 깊이 있는 철학을 통해 문화를 정립했음에도 현대 사회에서 그 의미가 잊혀 가는 현실을 지적하며, "우리는 조상들의 하느님을 알 턱이 없지요"라는 구절은 뿌리 잃은 현실의 심각성을 꼬집는 비수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는 현대인의 정체성 혼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고, 책사냥꾼님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민족 정체성 탐구에 대한 열정을 뜨겁게 불 지폈을 것입니다.



우리 말은 어떻게 고대 문명을 기억하는가?

1. '누이'와 '잠(蠶)', 단어에 깃든 고대 여성의 숨결과 생명의 철학

『쥐뿔이야기』의 진정한 압권은 제6장, '상고사를 통해 본 어원' 챕터였습니다. '돈', '누이', '저', '서방님', '우리' 등 일상적인 낱말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흥미로웠습니다. 평소 한자 해석이 막힐 때 우리말을 통해 유추가능함을 느껴왔던 책사냥꾼님에게, 이는 언어와 역사의 밀접한 관계를 일깨우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누이'의 어원은 아득한 고대 여성들의 사회상을 엿보게 합니다. '누이'와 '누에'(누에고치)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발음적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며, 누에의 신 '嫘祖(누조, 뤼조)' 역시 '밭에서 실을 생산해 내는 여자'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뽕나무와 누에를 길러 비단실을 생산했던 여인들을 지칭하던 말에서 '누이'라는 어원이 유래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합니다. 조선 시대 왕비가 창덕궁 주합루에서 직접 누에를 치며 백성들에게 양잠을 권장했고, 누에의 신인 뉘조에게 제사를 지냈던 '선잠단'의 역사적 사실 또한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다음으로 누에 '잠(蠶)'의 어원에 대한 탐색입니다. 저자는 '잠들다'는 표현이 누에의 생태적 특성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합니다. 누에가 뽕잎 먹기를 멈추고 잠을 자는 모습과 사람이 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모습이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이 죽는 것을 '고이 잠들다'라고 표현하는 해석은 깊은 감동을 안겼습니다. 번데기가 '무덤' 속 깊은 잠을 자다가 나방으로 부활하는 것처럼, 죽음 이후의 부활이라는 고대의 철학적 인식이 언어 속에 담겨 있다는 해석에 신비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2. '돼지' 토템과 자신을 낮추던 조상들의 겸손한 언어 '저豬', '제'

'돼지'에 대한 어원 풀이도 흥미로웠습니다. 자신을 낮춰 지칭하는 대명사 '저'와 '제'의 어원에는 놀라운 가설이 있습니다. 삼황오제 시대의 백익 종족이 돼지(豕)를 토템으로 삼았는데, '저'나 '제'를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 돼지족은'이라는 의미를 내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우리 언어 속에 고대 선조들의 생활과 사상이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증명합니다.


또한, '돈豚(돼지 돈)'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돼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흥미로운 가설이 있습니다. 고대 백익의 종족은 돼지豕(돼지시)를 토템으로 삼았으며, 이 '돈족'이 사용하던 화폐가 바로 '돈'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심지어 자신을 낮춰 자녀를 부를 때 쓰이는 '돈아'나 '가아'라는 표현도 '돼지 돈(豚)'이나 '집 가(家)'와 연관 지어 그 어원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현대에도 '돼지 저금통'이나 '돼지꿈'이 재물과 연결되는 현상은 이러한 고대 토템 사상이 언어와 문화에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보여주는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자가 가진 깊은 의미와 우리말의 풍부한 어원을 연결 짓는 또 다른 통찰을 제공합니다.


3. '우리 마누라'의 유래, 공동체 정신과 고대 혼인 풍습 '푸나루아 제도'

나의 집이 아니고 우리 집, 내 동생이 아니고 우리 동생이라는 언어습관이 궁금했었습니다. '우리 마누라', '우리 아버지' 같은 가족 호칭의 어원은 고대 혼인 풍습인 '푸나루아 제도'에서 유래합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남녀가 각 1명씩 혼인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 2명 여자 2명이 1조가 되어 같이 혼인하는 제도였다고 합니다.


즉 남자는 6~7세 된 어린 아우나 또는 조카를 데리고 장가들고 여자는 반드시 6~7세 된 친정 질녀를 데리고 시집가는 혼인 제도였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신랑 신부가 부부생활을 하다가 조카와 질녀가 성숙해지면 남편은 처질녀와, 아내는 시동생과(또는 시조카) 맞바꾸어 부부생활을 하게 됩니다. 한 울타리 안에서 집안의 대소사를 주관하게 되는데, 말하자면 남편 2명과 아내 2명이 서로 공동 부부가 되므로 서로가 '우리 마누라'이고 '우리 남편'이 되는 셈이라는 것입니다.


'서방님'은 신랑이 '서쪽에서 온 사위', 즉 '서방(西方)에서 온 님'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서방님'은 고대 신농이 서쪽 섬서성에서 동쪽 산동성으로 장가든 사례처럼, 신랑이 '서쪽에서 온 사위', 즉 '서방(西方)에서 온 님'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부가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어린 시동생이나 조카를 '데려온 님'이라는 의미로 '데렌님(데려온 님)' 또는 '도련님'이라고 불렀으며, 이 '도련님'이 성장하여 새로운 부부 관계를 맺게 되면 비로소 '서방님'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는 설명은 우리말의 아름다운 변화 과정을 엿보게 합니다.


결혼식에서 어린아이들이 꽃바구니를 들고 입장하는 '화동(花童)' 문화나, 시동생을 '새 서방님'이라 부르는 유풍은 이러한 고대 공동 혼인 풍습의 흥미로운 흔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일상적인 언어 속에는 수천 년 전 조상들의 사회 구조와 생활양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지성의 빛, 내면의 어둠을 꿰뚫다


『쥐뿔 이야기』를 읽는 것은 단순히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을 넘어선 심오한 지적 여정이었습니다. 한민족의 역사와 신화, 어원, 문자, 풍속 등 다양한 주제는 주류 학계의 시선과는 다른 길을 걸었지만, 그 속에는 잃어버린 민족의 뿌리를 찾는 재야 사학자의 뜨거운 열정과 깊이 있는 통찰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신선한 충격과 잊고 있던 지적 열정을 일깨우는 경이로움을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우리말 어원에 대한 탐구는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오래된 이야기들이 살아 숨 쉬는 듯한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한자를 단순히 '중국 문자'가 아닌, 동이족의 숨결이 깃든 '동방 문자'이자 우리의 유산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우리말의 숨결을 불어넣을 때마다 깨어나는 의미의 명료함은 매혹적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시간의 벽을 허물고 아득한 과거의 조상들과 깊은 교감을 나누는 듯한 감동에 젖어들었습니다.



에필로그:『쥐뿔이야기』, 언어의 심연에서 뿌리를 찾다


이 황홀한 발견의 여정 속에서도 학문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객관성과 논리성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쥐뿔 이야기』의 어원 해석이나 역사적 주장은 주류 학계의 시선과 다른 지점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다양한 사료를 비교 분석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학문적 탐구 자세이자 지적 성장을 위한 필수 과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던지는 질문과 통찰은 우리 존재의 뿌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정체성을 성찰하게 하는 감동적인 과정임은 분명합니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문화, 사상이 집약된 살아있는 유산이라는 점을 『쥐뿔이야기』는 강력하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언어 속에서 우리는 과거와 소통하고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끝없는 숙제는 우리를 더 넓고 깊은 이해로 이끌어 줄 아름다운 여정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 글을 통해 『쥐뿔이야기』라는 매력적인 책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이를 마주하게 될 또 다른 책사냥꾼이 있다면, 그에게도 저와 같은 지적 흥분과 사유의 여정이 펼쳐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말 속에 담긴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쥐뿔이야기 표지>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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