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영 지음
박소영 작가의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헤밍웨이 문학의 겉모습을 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숨은 인간의 내적 투쟁과 성장의 순간들을 정교하게 드러낸 안내서다. 저자는 단순한 줄거리 요약이나 비평을 넘어, 각 작품이 전하는 삶의 철학을 포착한다.
키워드 : 나의 청새치는
노인은 바다 한가운데서 여러 갈래의 줄을 드리운다. 그 끈들은 단순한 어획의 연장이 아니라, 삶을 향해 조용히 뻗어 나가는 인간의 의지를 상징한다. 그의 노력은 기다림이 아닌 시도, 행운을 비는 것이 아닌 손 내뻗음이었다.
성공이 오지 않아도 줄을 걷지 않는 태도, 그 고요한 고집이 바로 인간의 품위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광야의 어둠 속에서 여러 곳에 우물을 파던 이삭을 떠올렸다. 막히면 자리를 옮기고, 다투면 등을 돌리고,
그러면서도 땅을 포기하지 않던 사람. 그는 억울함에도 칼을 들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음으로 스스로를 잃지 않았다. 그 인내가 결국 “르호봇(Rehoboth)”이라는 넓고 여유로운 우물을 만나게 된다.
마침내 흘러나온 물은 그가 버티고 파낸 모든 날들의 증언이었다. 노인의 바다와 이삭의 광야는 서로 다른 풍경이지만, 두 사람의 손끝은 같은 결을 가지고 있었다. 운명을 기다리는 대신, 운명에게 먼저 손을 내밀던 사람들.
바다에 드리워진 가는 줄들,
광야에 남은 작은 흙더미들,
그 모든 흔적은 우리가 무엇을 꿈꾸고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 조용히 대답해 준다. 나의 청새치는 무엇인가. 내가 줄을 던져야 할 바다는 어디이며, 한 번 더 땅을 파야 할 광야는 어디인가. 새벽이 오기 전의 어둠 속에서조차 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움직이는 자에게만 길은 모습을 드러낸다.
키워드 : 감정의 조종사
해야 할 일과 걱정은 분리되어야 한다. 걱정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한다. "걱정한다고 네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성경 말씀을 헤밍웨이의 작품과 연결하는 순간, 묘한 울림이 생긴다.
나는 부정적 생각 속에 머무를 수도, 시점을 틀어 그곳에서 걸어 나올 수도 있다. 그 선택은 늘 나에게 달려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것도 하나의 지혜다. 즐김은 현실을 도피하는 얄팍한 웃음이 아니라,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유쾌한 검이 된다.
우리가 만들어낸 핑계와 남 탓은 결국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작은 방패일 뿐, 그 뒤에 숨은 진실을 오래 외면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에서 멀어진다. 우리는 매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걱정에 쓰고 있을까? 걱정이 마음을 잠식할 때는 차라리 먹고 자는 가장 본능적인 행위에 집중해 보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은 단순한 생활의 격언이 아니라, 가장 두려운 순간 본능에 충실,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 줄을 알려준다. 결국 감정의 조종석에는 언제나 내가 앉아 있다. 핸들을 놓지 않는 한, 내 마음은 어떤 폭풍 앞에서도 다시 길을 찾는다.
키워드 : 상처는 드러낼 때 치유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챕터다. 트라우마는 숨기면 숨길수록 어둠을 먹고 자란다. 그러나 드러내는 순간, 상처는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얻고 치유의 첫 빛을 맞는다. 글쓰기는 상처를 드러내는 가장 온순한 방법이며, “글쓰기 자체가 치유의 행위”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나쁜 일이 멈출 때는 그 부재(不在)만으로도 공허함이 채워지지만, 좋은 일이 멈출 때는 더 나은 무언가가 나타나야만 비로소 공허함이 채워진다.
'
집이 없을 때는 집만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막상 집이 생기면 '더 크고 좋은 집'을 소망하게 된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은 우주보다 넓기에, 욕심의 크기는 끝없이 팽창한다. 좋은 일이 생긴다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이내 곧 또 다른, 더 좋은 것을 찾아 헤매야 하는 다음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우울의 늪에 빠진다. 내가 태어난 이유, 살아가야 할 이유, 고통받는 이유, 그리고 사랑하는 존재가 하루아침에 먼지처럼 사라지는 이유까지, 그 모든 것의 의미를 필사적으로 찾아내야 한다.
금이 뜨거운 불을 지나야 진가(眞價)를 드러내듯이, 우리의 마음 또한 상처라는 시련의 불을 통과해야만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본연의 단단한 결을 되찾는다.
트라우마는 단순히 피해야 할 어둠이 아니다. 그것이 세상 밖으로 말로 표현되고, 기록되며, 빛 아래 세워질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치유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 역시 그 치유의 길을 걷고 있다. 오랫동안 깊이 숨겨 뒀던 상처를 아들의 결혼식 축사라는 환한 빛 앞에서 처음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지금은 브런치(Brunch)에 쓰는 문장 속에 그것을 조미료처럼 은근하게 섞어 넣으며 마음에 스며들게 하고 있다.
글쓰기는 결국 내상을 다스리는 의식(儀式)이다. 마음의 지하실에 묶여 있던 감정들이 문장의 통로를 타고 서서히 세상으로 걸어 나온다. 그 어둠이 멈춘 자리에, 비로소 삶의 새로운 공간이 열리고 있다.
키워드 : 지금 이 순간에 충실
고통의 반대는 거창한 기쁨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의 잔잔함이다. 전도서 1장의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구절처럼 이 땅 어디에도 완성된 천국은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끝없이 또 다른 천국을 찾아 헤맨다.
소설 속 브렛 역시 그러했다. 외로움과 도망, 도피와 방황 속에서 그녀는 결국 세상 어느 곳에도 완전한 안식은 없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그러나 헤밍웨이의 인물들이 그러하듯, 도망의 끝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늘 같았다.
지금 이 순간만이 유일한 현실이라는 사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삶을 소설에 녹여내며 고통을 문장 위에 올려놓았다. 경험은 글이 되고, 글은 다시 자신을 치유하는 통로가 되었다. 어쩌면 그는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삶이 자신을 짓누르지 않는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의 치유는 언제나 잔혹한 현실을 기록하는 행위 속에서 이루어졌다.
✧ 요한복음 8장 — 돌에 맞아야 할 여인과 순간의 은총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 붙잡힌 여인을 밀어 넣듯 끌고 왔다. 그들의 질문은 정의를 위한 물음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고, 자비를 베풀어도, 율법을 지켜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수는 즉답하지 않았다. 땅에 손가락으로 조용히 글을 쓰며 침묵을 길게 드리웠다. 그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과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한 문장이 군중의 심장을 꿰뚫었다. 가장 연장자부터, 한 사람씩 돌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결국 예수와 여인만 남았을 때, 예수는 조용히 말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 순간 여인은 죄인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선 하나의 인간이 되었다.
✧ 지금 여기—바로 이 순간의 회복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가지를 가르친다. 천국을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 누군가의 판단도, 스스로의 죄책도, 과거의 상처도 당장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충실할 수 있다. 이 순간만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해가 매일 다시 떠오르듯, 우리의 마음도 다시 밝아질 수 있다.
헤밍웨이의 인물들이 그러했듯, 예수님 앞에 서 있던 여인이 그러했듯, 삶은 결국 “지금”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다시 빛을 얻는다. 천국은 먼 곳에 있는 약속이 아니라, 오늘의 한 호흡 속에서 조용히 깨어나는 감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묻는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가?”
그 질문에 답하는 한 걸음이
다시 떠오르는 태양의 첫 빛이 된다.
박소영 작가의 책은 문학을 해석하는 수준을 넘어, 삶을 성찰하게 만드는 지적 체험을 선사한다. 헤밍웨이의 간결하고 냉정한 문장 속에 담긴 인간의 투쟁과 성장을, 읽는 순간 독자는 마치 자신이 바다 위 노인과 함께 줄을 던지는 듯한 긴장과 희열을 느낀다. 또한 걱정, 상처, 외로움 속에서 마음을 다잡고, 글과 사유로 치유와 통찰을 경험하도록 안내한다.
헤밍웨이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도, 이 책을 펼치면 자연스럽게 헤밍웨이 작품 속 세계를 직접 탐험하고 싶어지는 욕구를 느낄 것이다. 단순한 독후감이 아니라, 삶과 문학, 철학과 신앙을 연결하는 교차로이자,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어둠과 새벽을 바라보는 안내서다.
읽는 내내 느낀 점은 본질의 중요성과 진리는 하나, 경험이 살아있는 글을 쓰게 된다. 성경 말씀과 연관되는 부분이다. 쉽게 책장이 넘겨지지 않았다. 학창 시절 접한 헤밍웨이 작품을 중년이 된 지금, 다른 시선으로 접근하면서 현재의 나를 만나기 위해 신발끈을 동여맨다.
84일째 빈손으로 돌아오는 당신. 걱정이 키를 한 자라도 늘려줄 거라고 착각하는 당신. 상처를 숨기면 사라질 거라고 믿는 당신. 어딘가 더 나은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당신.
이 책은 그런 당신을 위한 책이다. 헤밍웨이를 읽지 않아도, 성경을 잘 몰라도 상관없다. 이 책이 묻는 건 간단하다.
오늘, 당신은 어디에 줄을 드리웠나?
걱정 대신 본능대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나?
상처를 조금이라도 밖으로 꺼냈나?
지금 이 자리에서 충실했나?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길이 열린다는 말은 그저 위로의 문장이 아니다. 두 세계의 고전이 함께 증명하는 진실이다. 광야에서 우물을 파던 이삭처럼, 바다에 여러 줄을 드리운 노인처럼, 우리의 삶도 어쩌면 "한 번 더 시도하는 손길"이 길을 열어주는 순간에 가까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책장을 덮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새벽이 가장 어두운 이유는 곧 해가 뜬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어둠을 견뎌내는 법은 의외로 단순하다는 것을. 오늘도 어제처럼 그저 줄을 드리우면 된다.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