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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고 난 뒤에야 보이는 것들

[필사]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25(D+375)

by 서강


신세계의 문턱

5백만 원이 5백50만 원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식품주라는 걸 샀을 뿐인데, 열흘 만에 50만 원이 생겼다. 10년 전 그날, 나는 내 손 안에서 불어난 50만 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게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해도 벌기 힘든 돈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주변에서는 이미 부동산이다, 주식이다 떠들썩했지만 나는 늘 바빴고, 관심을 둘 여유도 없었다. 혼자서 꾸려나가야 하는 살림은 당장 앞에 놓인 것부터 해결해야 했으니까. 그랬던 내가 우연히 주식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였고,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달콤한 착각을 맛봤다. 신세계였다. 아니, 그땐 정말 그렇게 믿었다.


밑 빠진 독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다. 오로지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당시만 해도 유튜브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고, 주식을 배운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대신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국내에서 제법 알아준다는 곳에 가입했다.


운영하던 가게를 정리한 돈, 전재산이나 마찬가지인 그 돈을 통째로 주식에 넣었다. 겁도 없었다. 근거 없는 믿음만 있었다. 그게 더 무서운 거였는데. 전문가의 리딩을 받았으니 괜찮을 거라 믿었다. 잔고는 이상할 정도로 계속 줄었다. 한 종목은 끝이 있을까 싶을 만큼 추락했다. 전문가는 말했다."물타기를 하세요." 전문가가 말했다. 물타기를 했다. 또 했다. 계속했다. 밑 빠진 독이었다. 결국 손절했다. 얼마 뒤 그 종목은 상장폐지가 됐다. 본의 아니게 손절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아파트 한 채 값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증발했다.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수업료라고 생각하자.' 하지만 오늘, 필사를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건 수업료가 아니었다. 그냥 돈을 갖다 버린 거였다. 내가 내 손으로, 나 자신의 무모함에 화가 났다. 하루하루가 생지옥이었다.


그때 통장에 남은 잔고는 겨우 100만 원이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숫자였다.


그래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직 100만 원이라도 남은 게 어디야.'


나는 이 돈을 종잣돈 삼아 공부부터 시작하자고 다짐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농부도 땅의 성질을 알고 작물의 특성을 고려하면서 농사를 짓는데, 나는 주식에 대한 기초 개념도 없으면서 전문가라는 사람만 믿고 덤벼 들었다. 내가 제일 큰 문제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다

그 이후 밤잠을 설치며 주식공부를 시작했다. 팔목에 염증이 생길 정도로 하루 종목 200개를 돌리면서 차트 움직임을 눈으로 익혔다. 까막눈이 조금씩 뜨였다. 손목의 통증은 공부의 흔적이자, 내 어리석음의 흉터였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책을 펼치고, 모니터 앞에 앉아 기업의 재무제표를 뜯어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사고 싶은가. 왜 지금인가. 이 회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그 질문들은 처음엔 낯설고 어려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의 질문과 닮아 있었다.

‘나는 왜 이 길을 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주식은 단순한 숫자의 게임이 아니었다. 욕망과 공포, 탐욕과 인내, 판단과 후회가 뒤엉킨 인간의 심리학이었다. 나는 시장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나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제야 보였다. 내가 얼마나 무모한 매매를 했는지, 전문가들이 소개한 종목들이 실적과는 무관한 소위 '잡주'들이었다는 사실이. 잡주는 등락이 심하다. 운이 좋으면 단기간에 큰 수익을 낼 수 있다. 전문가 입장에서는 수익률을 과시하기 좋은 종목이었던 것이다. 나 같은 무지렁이의 돈으로.


더 이상 나 같은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식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면서 감탄사를 자아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서 과거의 나를 발견했다. 몰라서 당하는 사람들. 알면 피할 수 있는데, 몰라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만으로 감사했다.


어느 날, 차트를 보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 예전의 나는 초침이 움직이는 것 같은 작은 하락에도 흔들렸고, 짧은 반등에도 숨을 들이켰다. 감정으로 매수했고, 두려움으로 매도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시장의 소음에 귀 기울이지 않고, 숫자 대신 본질을 본다. 투자는 기다림이라는 것을, 기다림은 고통 속에서 꽃핀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돈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

투자는 수익이 아니라 성장이라는 것.

시장은 누군가가 돼 가는 과정이라는 것.

오직 내 기준으로,

내 시간으로,

내 리듬으로 나아간다.



선택에 대하여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를 제외한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친구, 공부, 직장, 배우자, 투자 등 내가 선택한 결과물들이 모여 지금의 내 삶이 되고, 내 주변 관계가 된다. 지난 과거를 돌아본다. 잘못된 선택들이 보인다. 신중하지 못하고 덜렁대는 성격 탓에 힘들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


이제라도 어떤 선택이든 신중하게 판단하고 결정하면 된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이 하루, 숨 쉴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내 앞에 펼쳐질 모든 일들을 선택하며 나는 오늘을 또 살아갈 것이다.


섣부른 선택은 이제 안녕이다.

오늘의 내 선택이 나의 미래가 될 것임을 알기에, 나는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신중하게 걸어가려 한다. 50만 원의 달콤함에 취해 아파트 한 채를 날린 사람의, 쓰디쓴 깨달음이다.


당신의 선택은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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