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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語)에도 향기가 있다

[필사]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28(D+378)

by 서강

말을 잘한다는 건 뭘까. 나는 오랫동안 그것이 유창한 언변이라고 생각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말을 하는 것,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지적할 건 지적하되 아름답게 포장해서 하는 말. 그런 게 말을 잘하는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타인 앞에서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면서,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는다. 가족이니까. 가족이라서. 이해해 줄 거니까. 그 말들이 얼마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상대의 가슴에 꽂히는지도 모른 채.


직장 동료에게는 차마 하지 못할 말을 남편에게는 서슴없이 한다. 친구에게는 배려하는 말투로 부탁하면서 자식에게는 명령조로 지시한다. 지인 앞에서는 예의 바르게 행동하다가 집에만 들어오면 제멋대로다. 가족이 다 이해해 줄 거라는, 아니 이해해야 한다는 이상한 확신 때문에.


나 역시 그랬다. 신혼 때 남편과 싸우면 화가 나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막말을 퍼부었다. "당신은 왜 이렇게밖에 못해?"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든데!" 사랑한다고 결혼했으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말들을 했다. 그 말들이 상대를 얼마나 피투성이로 만드는 지도 모른 채.


세월이 흘러 뒤돌아보니 그때의 내가 부끄럽다. 왜 그랬을까. 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가장 함부로 했을까. 타인에게는 보여주던 그 배려와 존중을, 왜 가족에게는 보여주지 못했을까.


얼마 전 시장에서 한 부부를 보았다. 할머니가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어디 내가 들어줄까" 하며 다가갔다. 할머니는 "괜찮아요, 나 들 수 있어요"라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웃으며 "그래도 내가 들게, 우리 같이 들자"라고 했다. 그 짧은 대화 속에 존중과 배려가 배어 있었다. 오십 년을 함께 산 부부에게서 풍기는 말의 향기. 그게 진짜 말을 잘하는 거구나, 싶었다.


괴테가 말하지 않았던가. 꽃을 주는 것은 자연이지만 그 꽃으로 화환을 만드는 것은 예술이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말이라는 재료를 어떻게 엮어내느냐는 우리의 몫이다. 똑같은 말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 생각해 보니 그건 거창한 게 아닌 것 같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향기 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 그게 아닐까.


오늘 아침, 반려견 똘이와 신이 아침 준비를 하는 딸에게 "잘 잤어? 어제 건강검진 후 후유증이 있다는 건 어때?" 하고 아침 인사를 건넸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반대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지기도 한다는 걸 우리는 너무 자주 잊는다. 가족이기에, 친구이기에, 오래 알았기에 더 조심해야 하는 게 말인데 말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내 말을 점검하려 한다. 이 말이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이 말투가 누군가를 존중하고 있는지.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하듯 정중하고 따뜻하게 말하려 한다. 그것이 내가 만드는 아름다운 화환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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