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27(D+377)
상복을 입은 내 앞에 오빠 내외가 섰다. 장례식장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국화 향이 뒤섞인 공기 속에서, 나는 넋을 놓고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퇴근하고 전화할게 " 하던 남편이 갑자기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도무지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더 큰 일에 비해."
올케의 위로는 그렇게 시작됐다. 순간, 장례식장의 모든 소리가 멈춘 것 같았다. 더 큰 일? 한 사람의 죽음보다 더 큰일이 뭘까.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칼이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가슴 한복판을 찔렀고,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위로는 참 어렵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은쟁반에 아로새긴 금사과 같다"라고 성경은 말한다. 정작 그 합당한 말을 찾기란 쉽지 않다. 슬픔 앞에서 우리는 뭔가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침묵이 어색해서,
그냥 있으면 무심해 보일까 봐,
아무 말이라도 건네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때로는 침묵이 가장 좋은 위로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 손을 잡아주는 것, 함께 울어주는 것. 말없이 국밥 한 그릇을 같이 먹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오히려 서툰 위로는 또 다른 상처가 된다. "힘내", "이겨내", "시간이 약이야"라는 말들도 그렇다.
지금 이 순간, 힘낼 기운도 없고 이겨낼 방법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말은 무겁기만 하다. 마치 "왜 아직도 슬퍼해?"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들린다.
주먹으로 때리는 폭행은 시간이 지나면 멍이 사라진다. 하지만 말로 때리는 언어 폭행은 흉터가 더 오래 남는다. 아무렇지 않게 던진 한마디가 누군가의 가슴에 평생 박혀 있을 수 있다.
나 역시 돌이켜본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말의 칼을 휘둘렀을까.
"그래도 넌 낫지"라고,
"요즘 누가 안 힘들어"라고,
"다 잘될 거야"라고 쉽게 말하지는 않았을까.
내 무심한 한마디가 누군가의 가슴에 또 다른 상처로 남아 있진 않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는 위로에 서툴다 완벽한 위로의 말 같은 건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상대의 아픔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것이다.
"이 정도면 괜찮아"
"더한 사람도 있어"도 아닌,
그저 "많이 힘들겠다"라고 인정해 주는 것.
그리고 때로는 말하지 않는 용기. 침묵이 금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곁에 머무는 것, 그것이 때로는 천 마디 말보다 큰 위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