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잠시 눈을 붙이던 참이었다. 얕은 잠 위로 전화벨이 울렸다. 평택에서 걸려온 친구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안부보다 먼저 필사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매일 보내주는 글을 빠짐없이 읽는다는 말이었다. 그날 읽은 문장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당신은 듣고 있나요, 아니면 내 할 말만 하고 있나요?"
가르치려는 마음이 앞설수록 공감은 멀어지고, 귀를 내어줄수록 대화는 깊어진다는 문장. 그 말이 자꾸 돌아왔다고 했다.
지인을 만나 점심을 먹고 들어왔다고 했다. 외향적인 성격인 지인은 요즘 무기력증에 걸려있다고 한다. 친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조언을 꺼냈다. 왜 그런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말은 길어졌고, 지인 얼굴은 굳어졌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필사를 다시 펼쳤단다. 그제야 자신이 보였다고 했다. 위로가 아닌 처방을 건네던 얼굴. 듣기보다 이끌려했던 태도. 글 속 문장이 거울처럼 서 있었다고 했다.
"미리 읽고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웃음 끝에 짧은 숨이 섞였다. 그 숨에서 후회가 느껴졌다. 나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글 한 줄이 사람을 바꿀 수 있느냐고.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은 여전히 필요하고 조언도 필요하다고. 맞는 말이다. 세상은 복잡하다. 때로는 명확한 답이 필요하다. 방향을 제시해야 할 순간도 분명 있다.
다만 순서가 다를 뿐이다.
내가 겪어보니 그랬다. 먼저 귀를 내어준 날에 대화가 달라졌다. 침묵을 견딘 날에 상대 마음이 열렸다. 조언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때 건넨 말이 더 깊이 닿았다.
필사는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멈추게 한다. 멈춘 자리에서 자신을 보게 한다. 그 순간 말의 방향이 바뀐다. 상대가 아니라 나 쪽으로.
귀 내어주기는 거창하지 않다. 방법도 어렵지 않다.
먼저, 상대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중간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을 참는다.
둘째, 내 경험을 꺼내지 않는다. "나도 그랬어"라는 말은 잠시 미뤄둔다.
셋째, 질문을 던진다. 조언이 아닌 질문. "그래서 어땠어?" "지금 어떤 기분이야?"
넷째, 침묵을 견딘다. 말없는 시간이 불편해도 채우지 않는다.
이 네 가지만 해도 대화는 달라진다. 시도해 보시라. 당신도 느낄 것이다.
오늘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해보시라. 조언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잠시 멈춰보시라. 내 말보다 상대 말에 귀를 기울여보시라. 거창한 변화를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 작은 틈, 작은 숨, 작은 눈빛의 변화면 충분하다. 그 작은 것들이 쌓여 관계는 달라진다.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누군가를 바꾸려는 마음은 내려놓는다. 다만 귀를 내어주는 문장을 남기고 싶다. 읽는 이가 잠시 멈출 수 있도록.
창밖으로 겨울바람이 분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흔들리면서도 부러지지 않는다. 귀 내어주기도 그렇다. 흔들려도 괜찮다. 다만 끝까지 서 있으면 된다. 그 멈춤이 또 다른 대화를 시작하길 바라면서. 평택 친구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당신은 듣고 있나요, 아니면 내 할 말만 하고 있나요?"